며칠 전 어느 모임에서, 투표할 사람을 정했느냐는 질문을 받은 동료 한 사람이 “내가 찍는 사람마다 당선이 되니까 이제는 투표하기가 정말 겁난다”고 대답했다. 나는 매번 적중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두려움에 완전히 공감했다.
찍는 후보마다 당선이 된다면 얼마나 신나는 일이어야 하는가. 그러나 우리 정치 상황은 대개 찍을 때부터 썩 내키지 않는 투표를 하고, 자기가 찍은 후보가 당선이 되어도 기대와 환희보다는 근심과 불안이 더 크다. 그리고 그 근심과 불안은 얼마 안 가서 분노로 바뀌고 그 사람의 임기가 끝날 날을 고대하게 된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길고 험한 투쟁 끝에 얻어 낸 대통령 직선제인데, 서글프고 처량하기 그지없는 현실이다.
지난 19일, 우리 국민은 ‘이회창과 기존 질서 유지’와 ‘노무현과 새로운 모험’ 중에서 후자를 선택했다. 이번 선거의 특징이 세대간의 대결이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기성세대 중에서도 모험 쪽에 끌렸던 사람도 적지 않았고, 젊은 세대 중에서도 모험을 불안하게 여기는 이들도 많았다고 한다.
필자도 모험의 가능성에 일찌기 끌리지 않은 바 아니었지만 당시 노무현 후보의 실망스러운 언동 때문에 너무 위태로운 모험이라고 단정했고, 정권 장악을 위해서 그가 계속 지탄하던 재벌과도 손잡는 ‘후보단일화’를 보고는 그가 주도하는 모험에 동참하지 않기로 마음을 확고히 정했다.
노 후보가 당선이 되니까 ‘모험’에 대한 기대심리가 되살아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노무현 당선자의 걱정스러운 몇 가지 성향들로 인해 국가경영에 차질이 빚어지지 않을까 불안하다. 무엇보다도 걱정스러운 것은 노 당선자의 면밀하고 사려깊지 못한, 충동적인 발언과 행동이다. 물론 사람 성격의 장점과 단점이 동전의 앞뒷면 같은 것이라서 노 당선자의 투박한 성격은 그의 인간미의 증거일 수도 있고 그의 추진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충동적인 발언은 유세기간 중에도 그에게 수차례의 위기를 불러왔다.
“남북대화만 잘 되면 다른 것은 깽판쳐도 괜찮다” 같은 발언은 통일부의 하급관리라도 해서는 안되는 말이다. 바로 선거 전날에도 그는 ‘차차기 대통령감’에 대한 발언으로 다 이긴 선거를 망쳐놓을 뻔했다. 그 발언이 국민통합21의 정몽준 대표의 지지철회 선언을 유도할 목적으로 한 계산된 도발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 모욕과 배신에 대한 정몽준 대표의 반응이 오히려 “후보 단일화는 노 후보에게 타격을 주기 위한 외세의 음모였다”는 식으로 해석되어 인터넷으로 퍼지면서 젊은 층을 투표소로 불러내었고 노 당선자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다니, 노 당선자는 분명히 ‘억세게 재수좋은 사나이’이다. 노 당선자는 이 천재일우의 행운에 겸허히 감사하기 바라고, 행여라도 자신은 하늘이 특별히 가호하는 인물이어서 치명적인 실수조차 결정적인 승리의 기회가 되는 축복받은 인물이라고 믿지는 않기를 바란다.
대통령 후보일 때는 내 말의 실수로 내 표가 깍이면 그만이지만, 대통령은 무모한 말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국가의 운명과 체면과 국민의 생명과 안녕이 좌우될 수 있다. 특히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위협하고 있고 미국과의 관계도 다시 정립해야 하고, 북한과 미국, 북한과 일본의 수교에 역할과 발언권을 확보해야하는 마당에서 그가 성급하고 무모한 판단을 하고 거칠고 감정적인 말을 뱉어내어서는 국가적 재앙이 된다. 국내정치에서 그가 구상하고 있는 혁명적인 조치들 역시 과감함에 앞서 면밀함과 신중함이 요구된다.
굵직한 정책에 대해서 뿐 아니고 사소한 행동과 말에 있어서도 그는 이제 사적인 개인이 아니고 공인, 그 중에서도 온 국민의 대표이고 나라의 얼굴임을 깊이 자각해야 할 것이다. 공식외교석상에서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막말을 해서는 안되고, 폴란드에 가서 독일이나 독일인을 칭찬하는 실수를 범해서도 안될 것이다.
그에게 투표한 사람이나 안 한 사람이나 그의 당선을 5년간 기뻐하게 되도록, 앞으로 5년간 지혜와 성의와 인내를 다해 헌신해 줄 것을 노 당선자에게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