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작 후 한참 동안 배우 메릴 스트립을 알아보지 못했다. 환청과 환각에 시달리는 노령의 마거릿 대처를 노역(老役) 전문 배우가 연기하나 보다 싶었다. 아카데미가 '철(鐵)의 여인'에 여우주연상을 안길 만큼 메릴 스트립의 연기와 분장은 완벽했다.
대처는 1979년부터 11년반 동안 총리로 재임하면서 '영국병(英國病)'으로 만신창이가 된 나라를 일으켜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함께 소련에 강력하게 맞서 냉전을 종식시켰다는 찬사도 뒤따른다. 하지만 대처는 당시도 그랬고, 지금도 인기 있는 정치인이 아니다. 그를 흠모하는 사람도 있지만, 적도 많다. 파업을 무기삼아 정부를 좌지우지하던 노조와 타협하는 대신 강경책으로 맞섰고, 국민들에게 '당근'을 나눠주기보다 허리띠를 졸라매게 했기 때문이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도 대처는 광부 파업을 강경 진압하는 악인(惡人)으로 나온다.
지방 소도시의 잡화점상 딸로 태어나 옥스퍼드대를 졸업하고 금녀(禁女)의 영역인 하원에 입성한 대처는 전형적인 자수성가의 모델이다. 아버지 로버츠는 딸에게 "노력하면 반드시 보답이 온다"고 가르쳤다. 세습 귀족과 엘리트들이 우글거리던 보수당에서 대처는 그 누구보다 우직하게 개인의 노력과 자율성을 중시하는 보수당의 가치를 밀고 나갔고, 수백년의 역사를 지닌 영국 의회 사상 첫 여성총리에 올랐다.
유권자의 표(票)를 받아 선출되는 정치인이 대중과 이익집단의 요구에 '노(No)'라고 말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하지만 대처는 영국을 구하기 위해선 그 방법밖에 없다고 믿었고, 이런 신념과 원칙을 따른 지도자였다. 영화 속에서 대처는 이렇게 말한다. "중요한 것은 대중의 기분이 아니라 신념과 원칙을 지키느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가는 비쌌다. 설득보다 원칙을 내세운 대처는 세번째 총리 임기를 수행하던 1990년, 여당인 보수당 의원들의 반란으로 당대표에서 밀려나 사임했다.
2012년 한국에서 '철의 여인' 대처의 존재는 유난히 도드라진다. 총선과 대선을 앞둔 여야 정치권이 앞다퉈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장밋빛 공약을 남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권후보라는 사람들은 신념도, 원칙도 없이 선심성 복지공약을 내놓기에 바쁘다. 초·중등학생 점심 무상급식에 반대했던 새누리당이 아침까지 공짜로 주자고 나서고, 옛 민주노동당의 복지공약까지 베끼는 판이다.
이런 분위기에선 메릴 스트립이 아무리 신들린 연기를 펼친들, 대처가 한국에서 화제로 떠오르기 어렵다. 보수우파들은 책을 안 읽는 것은 물론, 영화도 안 보는 모양이다. 지난달 23일 개봉한 '철의 여인'은 아카데미 수상 덕분에 반짝했지만 예매율이 바닥을 기고 있어 언제 막이 내릴지 모르는 신세다. 대처 평전을 낸 박지향 서울대 교수는 "우리에게도 대처처럼 이익집단들의 분파적 이기주의를 제어할 수 있는 지도자, 근면과 노력과 수월성이 인정받는 사회를 확립하는 데 앞장설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섣불리 찍고 난 후 "손가락을 자르겠다"며 객쩍은 후회를 하지 말고, 선거에 나서 지도자가 되겠다는 이들 중에 이런 인물이 있는지 꼼꼼히 따져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