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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영국의 의료 시스템
코리안위클리  2013/03/13, 07:19:59   
▲ 간호사 등 영국의 보건의료 근로자들이 지난 1월 30일 정부의 연금정책에 항의하며 총파업을 벌이고 있다.

심혈관 수술 위해 입원 대기 한달 귀 치료 대기에 3주일
뇌막염 아이 치료는 ‘논스톱’

영국이 자신들 표현대로 ‘후진국에서나 일어날’ 망신스러운 일로 세계적 관심을 받고 있다. 잉글랜드 중부 스태퍼드(Stafford) 병원에서 2005년과 2008년 사이에 최소 400명, 최대 1200명의 환자가 영국 언론 표현대로 ‘필요없이(needless)’ 사망한 사건 때문이다. 영국 국가의료보험제도(NHS·National Health Service) 개혁 과정에서 과도한 경비 절감으로 인한 부적절한 치료가 원인이 되어 일어난 사건이다.
2년여에 걸친 정부 조사 끝에 나온 공식 자료는 100만여 쪽에 달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간호사 부족으로 환자 가족이 환자의 약 관리부터 치료와 검사를 위한 이동도 책임져야 했고, 마실 물이 없어 환자가 화병의 물을 마셔야 했던 것은 생명에 직접 위협이 가해지지 않는 ‘작은 일’에 속한다. 거동을 못하는 환자가 침대에서 그대로 용변을 봐야 했고 몇 주 동안 목욕을 하지 못했다. 화장실 청소가 안 돼 환자나 가족들이 손수 청소를 하고 피가 말라붙은 붕대를 직접 갈아야 했다. 제일 기가 막힌 일은 자격이 없는 응급실 안내원이 환자 상태를 보고 치료 완급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어린이 환자의 심장박동 모니터 기계를 관리하기 귀찮다고 전원을 뺄 정도였다. 이런 정부 보고서도 죽은 환자 가족들이 들고일어나서 만든 환자가족협의회의 수년에 걸친 투쟁 끝에 나온 것이다. 현 보수·자민 연립정부는 자신들의 집권 이후 결단을 내린 덕분에 이런 보고서라도 나와 현실을 파악하게 됐다며 위안하고 있다. 2005~2008년 집권당이었던 노동당 정부는 의료 실태에 대한 공식 조사를 회피해 왔다.

의사 부족, 동남아 의사들로 대체

영국 교민들 사이에 국가의료보험제도(NHS)와 관련해 회자되는 말 하나가 ‘영국 병원은 죽을 환자는 무슨 수를 쓰든지 살려 놓는데, 별것 아닌 병으로 들어간 환자는 죽어 나온다’이다. 특이한 병이나 심각한 병은 최고의 기술진을 동원해 어떻게든 살려 놓는데, 가벼운 병은 순서를 기다리다가 병이 도져 죽거나 간단한 수술 경험조차 없는 의사가 맡아 망친다는 말이다.
실제 필자 주위에도 최근 간단한 맹장 담석 수술을 잘못해 몇 주를 고생하다 나온 사례가 있다. 뉴몰던 한인타운 식당 주방장의 손가락 절단 사건은 유명하다. 요리하다 기계에 잘린 손가락을 들고 달려온 주방장을 병원은 응급조치도 안 해 주고 계속 “기다리라”는 말만 했다. 주방장은 안되겠다 싶어 손가락을 얼음 상자에 담아 오후 비행기로 한국에 들어가 성공적으로 치료하고 왔다는 얘기로, 여기서는 더 이상 화젯거리가 아니다.
필자도 한 시간이면 끝날 심혈관 확장 수술을 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해 한 달을 기다린 경험이 있다. 심혈관 확장 수술은 전신마취도 필요없는, 수술이라기보다는 시술이라고 해야 할 정도의 간단한 수술이다. 그런데도 한 달을 입원 대기했다. 통증이 있어서 치료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상태를 지켜봐야 하는 병도 아니었다. 그냥 수술 순서를 기다리며 안 그래도 모자라는 병상 하나를 차지하고 무작정 기다렸다. 나중에 수술이 이뤄진 병원에 이송돼 가 보니 새로 잘 지은 병실은 비어 있었고 수술 기계는 놀고 있었다. 수술 의사가 부족해 벌어진, 실소를 금치 못할 블랙코미디였다. 게다가 필자 담당 의사는 영어 발음으로 봐서 동남아에서 온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의사였다. 필자와 가까운 분은 거의 비슷한 경우로 수술을 기다리다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이런 사례를 들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정도고 매일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그래서 여유 있는 교민 환자들은 자비로 한국에 가서 치료를 받고 오는 게 일반적이다.
한 달을 고생한 필자의 심혈관 수술의 경우 ‘빠른 길’이 있긴 했다. 개인보험을 들지않은 상태에서 2000만원의 수술비를 부담하면 바로 다음날 수술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 이 방식으로 수속을 밟다가 의사로 있는 친지의 자녀가 “그렇게 자비를 들이지 않아도 얼마 안 돼 수술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권한 게 화근이었다. 이 말을 믿고 자비 수술을 중단한 결과 한 달을 기다리는 고생을 한 것이다.

상위 8%는 개인건강보험

물론 처음부터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들은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일주일” 하더니만 하루이틀 자꾸 “기다리라”는 말이 늘기 시작했다. 하도 진전이 없어 “퇴원해서 기다리면 안 되느냐”고 하자 “그렇게 되면 순서가 더 밀린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이 얘기를 들은 한국의 의사 친구는 “생명을 건 모험을 할 정도의 금액이 드는 병도 아닌데 왜 그랬냐”고 힐난을 했다. 필자는 당시 경험 이후 적지 않은 금액을 매달 내면서 개인보험을 들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개인보험이라고 해서 별다른 의료진이 수술을 하는 것도 아니다. 공립병원 일부를 ‘사립병원 지역’으로 만들어 사용하고, 인근에 따로 작은 규모의 사립병원을 운영하면서 개인보험 환자들에게 편의를 주는 정도다.
이 대목에 이르면 짐작하겠지만, 영국의 의료제도에 대해 일반적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사실이 많다. 영국 의사는 모두 공무원이 아니고 모든 병원이 공립도 아니다. 영국에도 영리재단들이 운영하는 대규모의 사립병원이 있어 개인보험 환자들을 받는다. 영국에서 성공한 전문의라면 런던 시내 할리스트리트(Harley Street)에 자신의 개인전문의원(private specialist health clinic)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할리스트리트의 전문의는 당연히 진료비도 엄청나게 비싸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전문의들 역시 공보험인 NHS를 위해서도 일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영국의 공립병원이나 사립병원은 사실 의료 수준의 차이는 없는 셈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비싼 보험료를 내고 굳이 사립병원을 이용한다. 그 이유는 필자의 경험에서 보듯 바로 시간과 서비스의 문제 때문이다. 개인보험으로 돈을 지불하면 사립병원에서 즉시 진료, 수술이 가능하고 보다 쾌적한 병실이 제공되는 등 차별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공립병원의 순서를 기다리기 싫어하고 보다 좋은 서비스를 받고자 하는 상위 8%의 사람들은 개인건강보험을 들어 사립병원을 이용하고 있다. 지금 영국의 의료개혁을 주도하고 있는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를 비롯한 정치인이나 의료계의 지도급 인사들도 공립병원이 아니라 개인보험을 들고 사립병원을 이용한다. 그럼에도 영국인들은 이에 대해 ‘국민적 위화감’ 등의 비난을 퍼붓지 않는다. 사립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사회지도층에 대해 반감을 가지지 않는 것과 같다. 외부인들로서는 이해하기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것이 오랜 계급사회인 ‘영국의 신비’이고 영국인들은 그렇게 산다.

가정의는 게이트키퍼?

영국의료제도에 대해 또 하나 잘못 알려진 사실은 일반의(GP·General Practitioner)라고 불리는 가정의(home doctor)의 신분이다. 지레짐작하듯이 이들도 공무원이 아니라 자영사업자다. 이들은 영국 의료제도의 첨병으로 각 동네에 개인 의원을 내고 운영을 책임진다. 영국에서 GP를 통하지 않고는 2차 진료기관(종합병원이나 전문의)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인보험이 있어 사립병원으로 가고자 해도 일단 자신을 담당하는 동네 GP에게 증세를 설명하고 전문의를 추천받아야 한다. 그래서 GP를 ‘게이트키퍼(Gatekeeper·수문장)’라고 부른다. 2차 진료기관으로 가는 환자가 여기서 거의 걸러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동네 GP의 환자로 등록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대도시 근처에는 인구에 비해 GP 숫자가 적고 일단 등록을 해도 실제 의사를 만나기가 어렵다. 필자가 사는 한인촌의 경우 의사 면담을 위해 3~4일을 기다리는 건 보통이다. ‘걸어 들어가서 진료받는 의원(Walk in Clinic)’이 없지는 않으나 대개 도시 한복판에 있고 주택지에는 없다. 그래서 가정의를 보기 위해 3~4일 기다리다 보면 감기몸살 같은 웬만한 병은 낫게 마련이다. 하긴 가정의를 봐도 열이 나고 몸이 아파 죽겠는데 겨우 처방해주는 약이 해열제이거나 “그냥 집에 가서 비타민C 많이 먹고 푹 쉬라”는 말 뿐이다. 한국처럼 감기몸살, 배탈 정도로 병원에 가서 주사 한 방 맞고 낫는 일은 영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다. 필자가 영국에 와서 산 30년 동안 주사를 맞은 일은 예방접종이 거의 전부가 아닐까 싶다.
이런 가정의 제도의 장점도 없지는 않다. 가정의를 ‘게이트키퍼’로만 쓰기 위해 만든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런 효과가 분명 나타나고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가정의 제도는 개인 가족의 병력을 환히 꿰는 의사를 둬서 보다 밀착형 진료를 하고 일반 환자가 어느 전문의에게 가야 할지 모르는 경우 도와준다는 의미로 시작된 제도다. 그렇다 보니 전문의나 종합병원으로 경증 환자가 몰리는 현상은 확실히 걸러주고 있다. 실제 가정의에게 오는 일반 환자 중 90%는 전문의 도움이 전혀 필요없다는 통계도 있다.

한국 의보보다 NHS가 한 수 위

필자도 수년 전 한쪽 귀가 잘 안 들리는 듯해서 전문의 진찰을 받으려 했을 때 개인보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3주가 걸렸다. 한국 같으면 거리에 즐비한 이비인후과 병원에 그냥 걸어 들어가 바로 의사를 만나면 될 일인데도 그렇게 걸렸다. 가정의 만나는 데 일주일, 가정의가 전문의에게 편지 써서 보내는 데 일주일, 그리고 전문의가 약속 잡아 통보해 주는 걸 받는 데 일주일이 걸렸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이 개인보험 회사에 전문의 진료를 위한 절차도 밟아야 한다. 만일 개인보험이 없는 일반 환자가 이런 위급하지 않은 병 때문에 전문의를 만나려고 하면 정말 얼마나 걸릴지는 ‘하느님도 모른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치질 수술은 3년, 편도선은 5년’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요즘은 간단한 백내장 수술마저도 생활에 심각한 지장이 있다는 진단이 나오기 전까지는 수술을 안 해 주어 어려움을 당한 사례가 있다는 기사까지 나오고 있다.
물론 일각을 다투는 심장마비 같은 병은 앰뷸런스가 차들 사이를 날아가다시피 해서 살려 놓는다. 그런데 이번 스태퍼드 보고서를 보면 이런 화급한 환자조차 전혀 자격이 없는 접수원이 잘못 판단해 치료를 늦춰 사망에 이르게 했다. 이 같은 어처구니없는 사례들을 보면 ‘기다림에 익숙하고 줄 서는 데 불만이 없는 영국인의 품성’이 일을 더 키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렵더라도 호들갑 떨지 말고 참고 견디라(Stiff upper lip)’는 품성 때문에 가족의 생명이 일각에 달려 있는 순간에도 영국인은 병원을 믿고 마냥 기다린 것이 아닌가 해서 하는 말이다. 당연히 한국인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우리 교민의 대부분은 중병에 걸리면 한국으로 뛰어가고 만다.
그렇다면 영국의 NHS가 정말 언론과 세인들의 집중 포화를 연일 맞을 정도로 엉터리이고, 밑바닥부터 모조리 뜯어고쳐야 할 만큼 형편없는 서비스를 제공해 왔느냐는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필자는 ‘아니다’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한국 의료보험과 영국의 NHS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필자는 서슴없이 영국 NHS를 고를 것이다. 그 이유를 필자의 또 다른 경험을 통해 얘기하고자 한다.

영국 국민 대부분 “의료제도 만족”

둘째 아이가 겨우 말을 한두 마디 배우던 나이에 밤새 고열에 시달린 적이 있다. 해열제를 먹여도 열이 내리지 않아 날이 밝자마자 가정의한테 뛰어갔다.(지금도 아동의 경우는 예약 없이 가도 순서 기다리지 않고 바로 가정의를 보게 해 준다.) 열을 재어보고 눈을 까뒤집어 본 가정의는 바로 영국 풍토병인 뇌막염(meningitis)으로 진단했다. 의사는 얼굴이 하얘지면서 “즉시 종합병원에 연락을 할 테니 앰뷸런스를 타고 가라”고 조치를 해 주었다. 종합병원에 도착했을 때 응급실은 이미 아이를 맞을 준비를 다 해 놓고 있었다. 보증인, 보호자가 있어야 하는 입원 수속도 없었고 여기저기 보내서 검사부터 받아오게 하는 절차도 없었다. 가정의의 1차 진단을 기초로 바로 다음단계의 진찰과 치료가 동시에 시작됐다. 그 이후 3일간 아이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아이가 의식을 회복한 다음 의사 세 명과의 면담에서 치료가 두세 시간만 늦었어도 균이 뇌로 침투해 뇌성마비를 일으켰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정말 신속하고 체계적인 영국 NHS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더욱 놀랄 일은 퇴원할 때였다. 치료비 정산은 물론 아무런 서류 절차도 없었다. 그냥 의사의 “퇴원해도 좋다”는 말이 전부였다. 영국에 간 지 얼마 되지 않던 때라 그때의 감동은 강력한 문화충격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아이가 입원하고 있던 병실에는 간병인은 물론 보호자마저도 옆에서 잘 수가 없었다. 혼수상태에 빠진 아이를 두고 집에 오는 심정은 정말 참혹했다. 간호사는 “당신들이 여기서 할 일은 없으니 우리한테 맡기고 집에 가서 좀 쉬라”고 간곡히 권유했다. 30년 전 한국의 고압적이던 간호사들만 보다가 친절과 미소가 몸에 밴 영국 간호사들의 헌신에 받은 감동 역시 잊을 수 없다. 아이가 퇴원하기 전 집에 방역팀이 찾아와 소독하고 가족 전원에게 주사와 약을 주었다. 뇌막염 2차 감염을 막는 조치였다. 동시에 사회보장 상담원이 가정 방문을 해 집 안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갔다. 말은 안 해도 집 안의 위생 상태와 제대로 아이를 키우는지를 검사한 것이다. 아이는 이후 거의 5년에 걸쳐 후유증 검사를 정기적으로 받았고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자라주었다. 사후관리도 철저해 검사 때가 되면 병원에서 먼저 알아서 약속 잡아 통보가 왔다.
비록 심장마비 위험을 감수하면서 병원에서 한 달을 기다리게 만든 NHS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흠을 얘기할 입장도 아니고 그럴 이유도 없다. 세상 이치가 원래 잘 된 일은 화제가 안 된다. 신문에는 NHS의 엄청난 실수 얘기만 등장하지만 그건 정말 사람이 개를 물어 기사가 된 경우다. 여론조사를 봐도 병원 입원환자 92%, GP 환자 87%, 외래환자 78%가 자신들이 받고 있는 치료에 만족하고 있다고 한다. 국민은 크게 불만이 없다는 말이다. 만일 내게 가장 이상적인 의료보험제도를 들라고 한다면 서민들은 영국식으로, 부유층에게는 한국식을 선택하게 하는 방법이다.

▲  2005~2008년 사이 400~1200명의 환자가 사망한 것으로 밝혀진 영국 중부 스태퍼드병원.

▲ 2005~2008년 사이 400~1200명의 환자가 사망한 것으로 밝혀진 영국 중부 스태퍼드병원.

 
제도가 아닌 사람이 문제다

영국의 NHS제도는 전 국민에게 전액 무상 의료혜택을 주자고 시작한, 좀 과장해 ‘인류가 만든 최고의 의료제도’라고 일컬어져 왔다. 1948년 전후 복구와 함께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 정부와 사회주의 지식인들이 보편적 인류애적인 견지에서 당시 야당과 의료업계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밀어붙인 야심작이다. 당시 비반 보건장관은 “우리는 이제 도덕적으로도 세계 최고(We now have the moral leadership of the world)”라고 자랑스럽게 외쳤다.
NHS가 영국 작가 A J 크로닌이 쓴 ‘성채(The Citadel)’라는 소설로부터 시작됐다는 말도 있다. 의사였던 크로닌이 당시 의료혜택을 못 받는 서민들의 실상을 소설에서 잘 묘사해 일으킨 국민적 공감이, 반대를 넘어서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NHS는 초기의 반대와 우려와는 달리 창설 이후 영국 내에 잘 정착되어 한국을 비롯한 온 세계가 배워 갔고, 더 이상의 무상 의료제도가 없다고 할 정도였는데, 60년이 넘으면서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 스태퍼드 보고서는 NHS 개선 방안 300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특히 NHS 내 직원들의 도덕심 결여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당하고 있다. 보고서는 NHS 내의 경영층, 의사, 직원 모두가 환자의 치료나 처우보다는 자신들의 권익 추구에 더 열심이라고 지적했다. NHS 문제를 예산 부족 문제로만 봐서는 한쪽밖에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 NHS가 처한 어려움의 중심에는 예산 부족보다는 구성원의 의식문제가 더 크다는 말이다. 현재 영국 NHS에 속한 직원은 118만명에 이른다. 단일 조직으로는 중국 인민군, 인도 철도청, 미국 슈퍼체인 월마트, 미군을 포함한 미국국방부 다음의 다섯 번째 가는 규모다. 그런데 보고서는 이 118만명 중 제대로 자신의 직업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 직원이 없다고 꼬집는다. 특히 스태퍼드 병원에는 그런 직원이 없어 언론의 지적대로 ‘제도적 방치(institutional blindness) 때문에 제도적 살인(institutional murder)’이 자행됐다는 것이다.
사실 NHS는 공기관화돼 목적도 의욕도 사명감마저 사라져버렸다. 그들에게 환자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픈 사람이 아니라 주어진 일의 하나일 뿐이다. 사립병원들은 그나마 이윤이라는 동기 때문에라도 환자에 대한 서비스를 강화하고 개선했다. 그러나 공기관으로 변해버린 NHS에는 그런 이윤 동기마저 없다. 거기다가 사회는 NHS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보건부 장관 제러미 헌트에 따르면 NHS 소속 병원들은 회의와 서류더미에 싸여 죽을 지경이라고 했다. 최고의 의료교육기관을 겸하는 한 병원 원장의 경우 한 주 일과시간 내내 외부 회의에 참석하느라 내부 일은 거의 볼 수 없을 지경이라고 했다. 거기다 무려 60개에 이르는 NHS 감독기관에 보고하고, 허가받고, 승인을 받아야 한다. 헌트 장관은 병원들에 가해지는 회의 참석과 보고서를 3분의 1로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구조조정 칼날 위에 선 NHS 직원

스태퍼드 보고서가 나오기 전부터 영국정부는 개혁의 의지를 분명히 하고 NHS의 비영리 재단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NHS 개혁의 원칙은 한마디로 선택과 경쟁(choice and competition)이다. 환자들에게 병원 선택의 권리를 돌려주고 병원끼리 경쟁을 유발시켜 살아남을 노력을 하라는 뜻이다. 대처 정부가 적자투성이의 정부 공기업을 민영화해서 영국 경제를 살린 방법을 캐머런 총리가 이제 영국에 마지막 남은 최고의 거대 공기업 NHS에 도입해 난관을 뚫어보겠다는 뜻이다. 최근 NHS 소속 병원 경영진의 관심은 환자 치료가 아니라 예산 절감이다. 재단화 스케줄은 정해져 있고 거기에 따라 일정 금액 이상의 예산절감을 해야 하고,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폐쇄를 하거나 민간회사에 매각되니 병원들로서는 목숨을 건 절감에 돌입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영국의 모든 공립병원은 보건부로부터 직접 감독을 받지 않는 비영리 공익재단으로 바뀐다. 이런 개혁을 거쳐 2년 내에 NHS는 200억 파운드의 예산을 줄여야 한다. 이는 현재 전국 NHS 예산의 20%에 해당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병원들의 통폐합, 응급시설 폐쇄를 비롯한 구조조정이 불가피하고 모든 NHS 직원은 새로 고용계약을 해 연봉을 삭감당해야 한다. 지금까지 정부 보조라는 온실에서 공무원 신분을 보장받던 NHS 직원들도 이제는 찬바람 부는 벌판으로 내몰리고 있다.
영국 정부의 의료제도 개혁은 궁여지책이라 볼 수 있다. 모든 영국인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한 사람당 연평균 2000파운드의 의료보험비를 세금 형태로 낸다. 그런데 영국 의료보험이 부담하는 경비는 일 년에 일 인당 약 3000파운드다. 결국 어디선가에서 일 년에 1000파운드라는 돈이 나와야 한다. 경기가 좋아 잘 돌아갈 때는 세금으로 걷으면 됐는데 이제는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결국 줄이는 방법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
영국이 낳은 최고의 과학자 호킹 박사는 NHS의 고도의 무상 치료가 없었다면 자신은 절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 단언했다. 만일 원가를 생각하는 이윤추구의 의료기관이었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최고의 의료혜택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영국이 자랑으로 여겨온 최고의 제도가 대의정치(representative democracy), 사회보장제도(NI·National Insurance), 국가의료보험제도 세 가지다. 이 중 이미 뿌리가 뽑혀나간 NI에 이어 지금 NHS마저 흔들리고 있다.

주간조선

글쓴이 권석하
IM컨설팅 대표. 영남대학교에서 무역학을 전공하고 1980년대 초 무역상사 주재원으로 영국에 건너가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유럽 잡지를 포함한 도서와 미디어 저작권 중개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월간 ‘뚜르드 몽드’ ‘요팅’, 도서출판 학고재 등의 편집위원도 맡았다. 케이트 폭스의 ‘영국인 발견(Watching the English·학고재)’을 번역 출간했다. 영국 국가 공인 관광가이드시험에 합격, 관광가이드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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