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법복, 판결의 공정성과 중립성 상징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을 따게 되면 축하 선물로 받는 것이 있는데 바로 가발이다. 판사든 변호사든 정규 법복(法服)의 하나인 가발을 쓰지 않으면 법정에 들어갈 수 없다. 보통 말의 갈기나 꼬리털로 만들며, 비싼 것은 1500파운드(300만원)가 넘는다. 색깔이 바랠수록 재판 경험이 풍부하다는 뜻이어서 평생 가발을 바꾸는 경우는 거의 없다.
17세기 들어 영국 법정에 등장하기 시작한 가발의 가장 큰 목적은 판사들의 개성을 숨기는 데 있었다. 개성이 너무 두드러지면 판사마다 제각각 다른 판결이 나올 것이란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여겼다. 불편하고 비위생적이란 불만 속에서도 영국 법조계는 형사 재판의 가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법복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세계관과 고민이 드리워지게 마련이다.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의 판사들도 독립 직후까지 가발을 썼지만 4대 대법원장 존 마셜이 가발을 없애고, 법복을 가운형으로 간소화했다. 신대륙 특유의 실용 정신이 엿보인다.
우리나라에 서양식 법복이 들어온 때는 일제 강점기였다. 1910년대 무단통치 기간엔 우스꽝스럽게도 판사도 칼을 차고 다녀야 했다. 3·1 운동 이후 일제가 ‘문화정치’로 돌아서면서 칼은 사라졌지만 법복 가슴 부위에 일본 천황이 임명했음을 뜻하는 오동 잎 무늬가 새겨졌다. 광복 후 한동안 평상복 차림으로 재판을 하다가 53년 당시 김병로 대법원장이 무궁화 무늬를 새긴 법복을 도입했다. 98년 채택된 현재의 법복은 옷 앞면의 수직 주름으로 강직한 이미지를 강조했고, 법원 문양이 있는 검자주색 양단을 대도록 돼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법복 모양이 몇 차례 바뀌는 가운데서도 법복의 색깔은 줄곧 검은색이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어떤 색에도 물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검은색은 공정성과 중립성을 상징한다. 천주교 사제복이나 축구 주심의 옷이 검은 색인 이유도 비슷하다. 판사의 길이 성직자의 길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말해준다. 법률과 양심으로 세상사를 판가름한다는 것이 사실 얼마나 두렵고 고독한 일이겠는가.
신영철 대법관이 판사들에게 보낸 e-메일이 재판에 대한 개입인지, 아니면 정당한 사법행정권 행사인지를 놓고 대법원 진상조사가 진행 중이다. 이번 논란으로 법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법부와 영욕의 세월을 함께해온 법복도 따지고 보면 얇은 천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 법복의 의미를 새기고 엄중함을 더하는 일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판사들 자신의 몫이다.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