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8일 주일 대사로 부임할 예정인 라종일(64) 전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에겐 20년 이상된 오랜 취미가 있다.
우리나라의 전래 설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영어로 옮기는 작업이다. 지금껏 쉬엄쉬엄 10여편의 영문 설화를 써서 <World & I> 등 외국 잡지에 기고해 왔고, 몇해 전엔 이를 한데 묶어 <라종일의 설화들>이란 제목의 문집을 펴내기까지 했다.
한평생 정치학자로, 외교관으로 살아온 그가 뜬금없이 설화의 재창조 작업에 매달리는 이유가 뭘까.
“정치도 결국 사람 얘기 아닌가요? 설화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옛날 얘기에서 현대인들에게 도움이 될 시사점을 찾고 있는 것이죠.”
어릴 때부터 <삼국유사> 등을 즐겨 읽었다는 라신임대사는 1980년대 초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수 중 신라 성덕왕 때의 수로부인 설화를 재구성한 첫 작품 <용과 미인>을 썼다. 원래의 설화는 절세 미인인 수로부인이 용에게 잡혀가자 백성들이 모여 ‘해신아 해신아 수로를 내놓아라…’는 노래를 불러 부인을 되찾았다는 내용. 그는 이 설화에서 늘상 용에게 굴복당하던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힘을 합쳐 용에 대항했다는 의미를 끄집어냈다.
“서양엔 용감한 기사가 용을 찔러죽이는 내용의 설화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백성들은 독특하게도 매우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연의 폭정에 맞섰어요.”
그는 군사 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국내 한 잡지에 이 작품을 실으려 했다가 용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빗댄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는 일화를 들려줬다.
수로부인 설화 외에도 라대사는 처용 설화·유리왕자 설화 등에 손을 댔고, 최근엔 청와대 재직 시절 시작한 지귀 설화의 집필을 마무리했다. 공직생활로 바쁜 와중에 어떻게 글을 쓸 짬을 내느냐고 묻자 그는 “남들 술 마시는 시간에 틈틈이 썼을 뿐”이라고 했다.
술자리에 갈 시간을 아끼다 보니 설화 작업 외에 테니스, 스쿼시, 합기도, 검도 등 운동도 못하는 게 없다고 한다.
“가족이나 친구들 반응은 신통치 않아요. 큰일하는 사람이 술도 어울려 마시고 해야지, 집에 들어앉아 설화나 쓰고 한다고요. 하지만 제 취미가 외교 업무에 보탬이 된 경우도 많습니다.”
라대사는 지난해 봄 4강 외교 차원에서 중국을 방문해 리자오싱 외교부장을 만났을 때를 예로 들었다.
“리부장이 자기는 취미로 시를 쓴다면서 제게 시집을 보여주더군요. 제가 설화를 쓴다고 하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처음 만났지만 친밀감이 느껴져 나중에 제 문집을 보내주기도 했죠.”
북핵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만났던 콘돌리자 라이스 미 백악관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에겐 신표만 들고 아버지(고구려의 동명성왕)를 찾아 먼길을 헤맸던 유리왕자의 설화를 들어 “부자든, 우방이든 가까운 사이일수록 의사소통이 어렵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설화를 영어로 다시 쓰는 건 세계화 추세 속에서 우리 고유의 문화적 자산을 지켜나가려는 노력이기도 하다”면서 “앞으론 아마추어인 나 대신 전문가들이 많이 나서줬으면 좋겠다”고 말을 맺었다.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