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가장 ‘미국화’한 영국에서 미국과 확연히 다른 영역으로 꼽히는 공공의료제도가 전 유럽을 억누르고 있는 재정긴축 압박 속에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데이비드 캐머런 행정부가 2015년까지 의료보험(NHS) 예산 200억 파운드(약 36조원)를 삭감키로 하면서 공공 병원에서 환자들이 겪는 불편이 커지고 있다. 아직 예산 삭감안이 본격 시행되지 않았음에도 병원들이 무상 진료 대상자의 기준을 높이고, 긴급한 수술을 제외한 시술의 평균 대기시간을 늘리면서 환자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신분 및 거주 증명서만 있으면 외국인을 포함해 누구나 무상으로 응급진료를 받을 수 있다. 또 환자들은 어떤 약을 처방받는지에 관계없이 7.4파운드(약 1만3천원)의 진료비만 지불하면 된다. 여기에 더해 어린이, 학생, 임산부, 노인, 장애인, 당뇨나 간질 같은 만성질환 환자, 저임금 근로자, 실업자 등은 진료비를 면제받게 돼 있어 실제로 7.4파운드를 내고 진료받는 환자는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최소한 영국에서 병에 걸려 가산을 탕진하는 일은 생길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그러나 캐머런 정부가 지난 1월 마련, 현재 입법절차를 거치고 있는 건보개혁안이 시행되면 그 시점부터 2년 안에 보건·의료 관련 일자리 2만개가 없어지고, 상당한 숫자의 공공병원이 폐쇄된다. 영국의 미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한 장소로 유명한 런던의 세인트 메리 병원도 폐쇄 대상에 들어갈 수 있다. 내년 4월 건보개혁 법안을 발효시킨다는 목표를 세운 캐머런 총리는 현재 6주 시한으로 의견수렴을 진행중인데, 일반인은 물론 의사와 간호사 등 의료 종사자들도 반발하고 있다. 왕립 의과 대학의 리처드 톰슨 경은 건보예산 200억 파운드 삭감안에 반대한다면서 “우리는 환자들의 대기 리스트가 길어지는 상황을 목도하고 있는데 이는 병원과 의사들이 환자들이 치료받으러 오는 것을 막는 시도를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또 영국의료연합은 정부가 추진중인 의료 분야의 경쟁 시스템이 의료 서비스 공급자가 환자가 진정 필요로하는 치료보다는 수익성 높은 치료를 택하도록 만들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런 공공의료 혜택 삭감은 영국 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하나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 올초 스페인은 건보예산 10%를 감축키로 했는데, 이는 정부 예산이 투입되는 외래 진료센터 100곳에 대해 폐쇄 또는 진료시간 단축 조치가 취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탈리아의 경우 의사와의 면담에 10유로(약 1만5천원)를 더 부담토록 하는 한편 급하지 않은 치료에 대해서는 25유로(약 3만8천원)를 더 내도록 했다. 프랑스는 의료와 관련한 비용보전 제도를 축소하는 한편 담배, 탄산음료 등 건강에 좋지 않은 기호품의 세금을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