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요즘 경기 어떻습니까’라고 물으면 ‘60, 80’이라고 대답합니다.”
한화그룹 A임원의 암호 같은 말이다. 그는 요즘 마음이 편치 않다.
지난달 26일 저녁 올해 상반기 실적을 가집계(추정)하다가 거의 기절할 뻔했다. 목표 대비 60%,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할 때 80%에 그쳤기 때문이다. 이를 줄여 ‘60, 80’이라고 말한 것이다.
연초부터 이라크 전쟁, 북한핵 문제, 중국의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 등 악재가 줄이어 사업이 안될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상반기 목표의 60%-작년의 80%
“하반기 대책도 막막하다” 한숨
그는 초조한 나머지 평소 알고 지내던 다른 그룹 임원한테 일일이 그들의 실적을 캐물었다. 다른 그룹도 비슷한 처지라는 답변을 듣고는 위안을 삼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다음날 회사 결산보고회의에 참석해 사장 앞에서 또 한차례 진땀을 빼야 했다.
보통 상반기 실적이 나쁘면 하반기에는 특별 대책을 마련해 보고해야 한다. 그런데 경기가 불투명하다 보니 사장을 납득시킬 만한 뾰족한 대책을 찾을 수 없어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는 얘기다.
세종증권 리서치센터의 윤재현 이사는 “수출과 내수가 워낙 안 좋아 건설·화학 등 일부를 빼고는 대부분 목표치에 크게 못 미칠 것으로 분석된다”며 “기업들의 하반기 실적도 뚜렷이 개선될 기미는 안 보인다”고 말했다.
개인 사업 “창업 기다려라”
전통음식 프랜차이즈 업체를 운영하는 Y본부장. 그는 수년간 전통음식을 연구한 끝에 프랜차이즈로 개발해 올 초부터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최근 중앙 일간지에 광고를 내자 이 사업을 해보겠다는 사람의 전화가 빗발쳤다.
조기 퇴직한 직장인·실업자·주부 등 문의 전화를 건 사람들의 계층도 다양했다. 그가 직접 사업을 상담한 숫자만도 1백50건에 이르렀다.
프랜차이즈 업체 상담 봇물…
“주위서 말려” 계약은 안해
Y본부장은 “현재 우리 사회에 실업 상태인 채 어떤 장사라도 해보겠다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프랜차이즈 사업 상담을 해준 사람 가운데 실제로 계약한 투자자는 겨우 한명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약을 하러와서 하는 말이 천편일률적으로 너무 똑같아 깜짝 놀랐다는 얘기다.
“사업을 당장 하고 싶은데 주변 사람들이 말려서 못하겠습니다. 사업을 하더라도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경제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시작해도 늦지 않다고 충고합니다.”
그는 소액 투자자들이 녹음기를 튼 듯 똑같이 하는 말을 듣고 현재의 불황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여춘돈 한국프랜차이즈시스템학회 회장은 “프랜차이즈는 불황 때 고용을 창출하는 사업으로 알려져 있다”며 “그러나 최근 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향후 우리 경제를 너무 어둡게 보고 있어 일어나는 한 단면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공단 주변 “5시에 길 막혀”
지난 25일 오후 5시30분 경기도 안산시 반월공단. 안산역 부근 4차선 도로가 꽉 막혀 있었다.
공단을 오가는 화물차는 한두대에 불과했고 대부분 퇴근길에 나선 승용차였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 시간대에는 공단 내 기업들이 한창 일할 때라 도로가 넉넉했다는 게 주변업체 관계자의 설명이다.
국내 최대 전구·조명기기 생산업체 W사의 한 직원은 이와 관련, “올 들어 공단 내 기업들이 일감이 없어 퇴근 시간을 앞당기거나 야근없이 정시 퇴근하는 근로자 때문”이라며 “우리 회사도 일부 생산 라인 근무자의 퇴근 시간을 6시에서 5시로 한시간 앞당겼다”고 설명했다.
일 줄어 야근 없고 단축근무
근로자들 즐겁잖은 ‘칼퇴근’
인천 남동공단과 서울 디지털국가산업단지(옛 구로공단)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들 공단을 관리하는 한국산업단지공단 경인지역본부 기업지원팀 안보광씨는 “지난 5월 말 현재 산하 공단 내 평균 공장 가동률은 80.4%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7% 떨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공단 내 기업들이 느끼는 체감경기는 공장 가동률 하락보다 훨씬 더 크다”며 “이렇다 보니 야근을 없애거나 연장 근무를 줄이는 기업들이 최근 부쩍 늘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관계자는 “SK글로벌 사태 이후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중소업체가 크게 는 데다, 수출·내수부진으로 제품 생산이 위축돼 공단 내 기업들이 근무시간을 많이 줄이는 추세”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