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얇아질 대로 얇아진
그 푸르름의 경계
홀로 익어가는구나
붉은 열매의 반짝거림이여
가지 가득 꿰뚫은
7월의 심장이여
<여름산책>
며칠전 체리농장에 같다가 빨갛게 익어있는 체리를 보며 시 한편을 끄적여 보았습니다.
한 점의 얼룩도 보이지 않는 깨끗하고 맑은 햇살 아래 붉은 뺨 반짝이는 열매들….
그것은 내 영혼 속으로 비쳐 들어오는 한 장의 강렬한 붉은빛 스테인드글라스였으며 결코 잃고 싶지 않은 한 조각 순정의 붉은 심장이었습니다.
그 옛날 체리는 아니지만 사기그릇 하나 가득히 앵두를 따서는 시원한 우물물에 헹구어 입안 가득히 털어놓고는 우물우물 씹다가 퉤퉤 씨를 뱉어내던 그 여름날 한낮의 추억이 생각났습니다.
먼 여기, 그 여름이 다시 생각났으며 붉디붉은 체리 열매를 입안 가득 털어놓고는 우물우물 씹다가 퉤퉤하며 씨를 뱉어보았습니다.
이렇게 런던의 여름도 시작되었습니다.
2.
오래된 영화 <콰이강의 다리>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태국과 미얀마 국경 사이에 흐르는 험난한 콰이강에 철교를 놓는 공사를 하는데 일본군이 영국군과 미국군 등 연합군 포로들을 동원하여 철교를 건설해 내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그 때 고든목사(후에 프린스톤대학 교목)라는 분이 그 포로 중에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는 영화에는 없는 고든목사의 증언입니다.
어느 날 저녁, 일을 끝낸 포로들이 공사장을 떠나 수용소로 돌아와서 그들에게 지급되었던 삽을 반납하게 되었습니다. 반납한 삽을 헤아려보니 한 자루가 모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본군 간수들은 노발대발해서 다그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냐? 누가 삽을 감췄느냐? 나와라. 빨리 안 나와? 안 나오면 다 죽여 버릴 테다”
그리고는 폭염이 무섭게 내리쬐는 연병장에 부동자세로 세워놓고 기압을 주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자 과로에 지친 포로들이 하나 둘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저쪽 끝에서 있던 졸병 하나가 조용히 앞으로 걸어나갔습니다. 그는 일본군 간수 앞에 나가 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납니다. 내가 삽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 순간 연병장의 모든 시선들이 그 졸병에게 쏠렸습니다. 격분한 일본군 간수, 포로들의 원망의 눈빛들, 성급한 일본군 간수 한 놈이 일본도를 들어 그 병사의 목을 내리쳤습니다.
그날 밤 포로들은 기압의 연속으로 저녁도 굶은 채 착잡한 심정으로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습니다.
다음날 아침, 다시 공사장으로 나가기 위하여 삽을 지급하고 보니 아, 삽 한 자루가 남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모든 포로들은 몸과 마음이 폭발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날 그들은 작업을 거부하고 수용소에 틀어박혀 머리를 싸안고 농성을 하였습니다.
그날 밤 그들은 한 자리에 모여 앉았습니다. 누군가가 성경을 열어 읽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한복음12:24-25)
그야말로 우리 가운데 있었던 한 초라한 동료, 모든 격분한 시선과 원망의 눈길을 한 몸에 받고 서 있던 보잘 것 없는 한 졸병이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한 알의 밀로 떨어져 그리고 썩어져서 싹이 트고 순식간에 많은 열매를 맺는 장엄한 순간이었습니다.
뒷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한다면, 그들은 이 한 알의 밀의 죽음을 의미 있게 하기 위하여 먼저 각자가 소지하고 있던 책을 내놓았더니 수천 권의 장서를 지닌 도서관이 되었고, 각기 보듬고 있는 지식과 기술을 내어놓고 틈틈이 가르치니 훌륭한 대학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없는 포로 수용소에서 자기가 갖고 있는 유일한 것을 내놓고 함께 나누었더니 삶이 한없이 풍성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찬바람이 이는 비인간적인 세계인 포로수용소 안에서 참으로 따뜻하게 함께 살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참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가슴 훈훈한 이야기입니다.
3.
미국의 소매상 협회에서 알아낸 조사통계가 있습니다. 판매원의 48%가 한 번 전화하고 포기하고, 25%는 두 번 전화하고 포기하며, 15%는 세 번 전화하고 포기한다고 합니다. 즉 88%의 판매원이 한 통 내지 세 통의 전화를 해보고 반응이 없으면 포기하는데, 나머지 12%의 판매원들은 끈질기게 전화를 걸어 결국 판매하게 되는데, 놀라운 것은 그 12%가 전체 판매량의 80%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제적으로 할 수 있다는 확고한 마음과 혹시나 하는 마음의 차이는 엄청난 것입니다. 성공과 실패란 바로 이런 마음들의 차이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어두워지지 않는 자가 마침내 성공합니다. 그 사람들이 12%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여름날 폭염 속에 허리띠를 두른 채 의관을 정제하고 앉았자니 땀이 비오듯 흐른다. 가만 있으려니까 그만 발광이 나서 ‘으아아’ 하고 고함을 지르고 싶다”란 뜻의 ‘속대발광욕대규(束帶發狂欲大叫)’란 시구가 생각나는 더운 여름입니다. 자칫 더위 때문에 포기해 버리기 쉬운 계절입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아들이 자기의 칼이 다른 사람들보다 한치나 짧다고 불평을 하자,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한치 더 앞서서 싸우라고 격려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여름 더위 때문에 힘들어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남보다 한 걸음 앞서는 여름이 되었으면 합니다.
- 김은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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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혁님은 아름다운교회 담임목사로 있으며, 시인,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인간성으로서의 하나님>, 시집 <작은 꽃 한송이 되고 싶구나>,
<그대가 되고 싶습니다>, <기쁨아 너를 부르면 슬픔이 왜 앞서 오느냐>,
<다시 사랑하고 싶다>와 칼럼집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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