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안에 따라 대립과 조정의 대여 전략 구사… 당내 ‘물갈이’ 의지는 확고한 듯
6월26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장의 화두는 단연 ‘변화’였다. 행사장인 서울 잠실체육관에 내걸린 대형 플래카드마다 ‘변화’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았다. ‘새로운 시작, 변화와 감동’, ‘변화 2003, 도전 2004, 희망 2007’, ‘변화는 내가 먼저, 개혁은 모두 함께’, ‘변화의 중심, 내일의 희망’, ‘변하자, 행동하자, 다시 뭉치자’ 등등. 한나라당 깃발을 든 기수들이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행사장에 입장하는 장면은 엄숙하기 짝이 없던 과거의 당기 입장 의식과 비교하면 파격에 가까웠다. 변화하고자 하는 한나라당의 열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당원들은 대선 패배 뒤 선장 없는 채로 험로를 헤쳐온 ‘한나라호’의 새로운 ‘선장’으로 최병렬 의원을 뽑았다. 최병렬 대표가 이끄는 ‘한나라호’는 과연 순항할 것인가.
22만명이 넘는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된 최대표는 막강한 힘과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 그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한나라당은 근본적인 변화를 이룰 수도 있고, 당의 얼굴을 바꾸는 정도의 변화에 그칠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표현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다. 오죽하면 히틀러를 빗대 ‘최틀러’라는 별명이 붙었겠는가. 하지만 그는 대표 수락연설의 메아리가 채 그치기도 전에 리더십의 시험대에 올랐다. 진보 성향 의원들이 때를 맞춘 듯 탈당을 공언하였고, 총무 경선을 둘러싼 신경전으로 당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그의 표현대로 ‘장밋빛 카펫이 아니라 수많은 가시밭길과 수렁’을 지나야 한다.
그의 앞길엔 숱한 난제가 놓여 있지만 그 중에서도 국민들에게 새롭고 달라진 야당의 모습을 선보여야 하는 게 급선무다. 내부적으로도 ‘수구정당’의 이미지를 털어내고 ‘환골탈태’를 이뤄내야 한다. 그는 두 가지 과제에 대해 머뭇거리지 않고 분명한 생각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대여관계 달라지나
최병렬 대표는 권역별 유세에서 “야당의 권력은 투쟁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당원집회에선 “(정권의) 무릎을 꿇리겠다”고 했고,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과격한’ 말도 했다. “단식투쟁을 벌여서라도 잘못된 것을 바로잡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했다. “협조하지 않으면 노무현 대통령이 되게 당할 것”이라는 ‘위협’도 가했다. 정부·여당에 대한 강경한 대응방침을 천명한 말들이다. 의석의 과반을 확보한 제1당이라는 현실적인 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대표 체제 이후의 정국이 여야의 대결 국면으로 치달으면서 급속히 냉각될 것이라는 전망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그는 “청와대로 소주 한 병 들고 찾아가 도와줄 건 도와주겠다”고 했다. “싸움질만 하는 게 야당의 역할은 아니다. 장외투쟁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 경제를 살리는 일엔 께지럭거리지 않고 흔쾌히 도와주겠다. 추경 등 민생은 철저히 분리해 대처하겠다”고도 했다.
상충되고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최대표의 말들은 그대로 그의 생각을 반영한다.
사안에 따라 대립과 조정의 전략을 적절히 뒤섞어 구사하겠다는 구상이다. 그의 한 참모는 “매사에 딴지 걸고 발목 잡는 식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일정한 원칙을 세워 거기에 어긋나면 강하게 몰아붙이되 나머지는 흔연하게 협조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가 가장 강경하게 대처할 것으로 예상되는 분야는 노동문제다. 그를 오랫동안 보좌해온 한 참모는 “노동문제에 관한 한, 최대표가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했다. 그는 노동부 장관 시절 총액임금제, 무노동무임금, 해외인력 수입 등의 예민한 사안을 눈치보지 않고 밀어붙였다. 그가 대표수락 연설에서 “집단이기주의와 인기영합에서 벗어나 공정한 원칙과 기준으로 산업현장의 질서를 바로잡겠다”고 다짐한 대목에서 노동문제에 대한 그의 강경한 시각이 묻어난다.
최대표는 6월27일 첫 당직자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경제살리기에 역행하는 국무위원이 있으면 가차 없이 해임건의안을 내서 밀어내겠다”고 공언했다. 과반의석이라는 물리력을 사용해 ‘장관 길들이기’에 나설 수도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보수세력이 일전을 벼르고 있는 전교조에 대해서도 강경한 태도가 예상된다. 이런 점을 들어 일부에선 최대표가 적절한 시기를 골라 노동부 장관과 교육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 제출을 주도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마냥 강하게만 밀어붙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당장 국민들이 “하나도 변한 게 없다”라며 염증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겐 뭔가 달라진 새로운 야당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부담도 있다. 최대표가 한나라당이 제출한 새 특검법안에 대해 애초의 강경한 태도에서 ‘150억원에 한해’로 한 발짝 물러서는 모습을 보인 것도 이런 맥락으로 해석된다. 그의 약속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정치적 대립을 이유로 예산안 등 민생·경제와 관련된 문제들이 국회에서 무한정 낮잠 자는 일도 없을 것으로 보인다.
최대표와 노무현 대통령은 여로모로 극과 극이다. 각각 보수와 진보 성향의 맨 앞자리에 있는 정치인들이며, 내년 총선에서 영남지역을 두고 물러설 수 없는 일전을 벌여야 한다. 그러나 극과 극은 통하는 법. 두 사람의 어법이 직설적이고 성격이 화끈하다는 점에서 마주 앉기만 하면 의외로 술술 매듭을 풀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물갈이할 수 있나
최대표는 경선과정에서 하순봉·양정규·김기배 의원 등 이회창 전 총재시절의 ‘왕당파’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이들은 강재섭 후보를 지지하는 것으로 분류됐다. ‘물갈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최병렬 의원이 대표가 되면 자신들에게 인적청산의 칼날을 휘두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예상대로 최대표는 취임 일성으로 ‘내부 기회주의와 기득권 타파’를 외쳤다. 이 얘기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민정계 출신의 중진들은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들이 어디 보통 실력자들인가. 섣불리 이들을 제거하려 했다간 최대표가 엄청난 저항에 부닥칠 수 있다.
‘물갈이’에 대한 최대표의 의지는 꽤 확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문제는 물갈이의 방법이다. 이회창 총재와 같은 제왕적인 공천권한을 휘두를 수도 없다. 이 때문인지 최대표도 일단 ‘제도와 시스템’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쇄신연대 등 당내 소장그룹에서 주장하는 지구당위원장제 폐지 등 전면적인 개혁론에 대해선 유보적 태도를 보인다. 공천 과정에서 대표가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두자는 의도로 해석된다. 저마다의 이해관계가 걸린 공천 관련 제도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최대표가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할 경우 민주당처럼 공천제도를 둘러싼 격랑에 휩싸일 가능성도 있다. 한 참모는 “매우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물갈이를 안하면 신진세력을 영입할 수 없고, 총선에서 지고 당이 죽는다. 최대표에겐 지상명령으로 부과된 총선승리라는 명분이 있으므로 해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내 변화를 주도하는 과정에서 최대표에겐 두 가지 무기가 있다. 하나는 명분이요, 또 하나는 사심이 없다는 점이다. 최대표는 경선과정에서 내년 총선에서 지면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또 “총선에서 승리해 젊고 유능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길을 가도록 하는 게 내 목표”라고 단언했다. 대표수락연설에선 “당을 위해 필요하면 생명까지도 바치겠다”고 원고에도 없는 말을 했다. 대권에 대한 욕심을 버렸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사심이 없다는 것은 거리낄 게 없다는 얘기다. 거리낄 게 없으니 명분만 있으면 앞뒤 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캠프 내부에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인데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불만도 나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최대표는 언론사 편집국장과 공보처, 노동부 장관, 서울시장 등 여러 직책을 거치는 동안 ‘일하는 재미로 사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야당의 대표, 그것도 과반의석을 확보한 제1야당의 대표는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 자리다. 그가 일하는 야당 대표가 될 지, 아니면 그간의 ‘관례’대로 일을 막는 대표가 될 지 그의 선택이 주목된다.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