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토니 블레어(사진) 총리가 영국의 국가체제를 현대적으로 다듬는 작업을 마무리했다고 방송 등 영국 언론들이 보도했다. 세습귀족의 특권을 폐지한 1999년의 상원 개혁에 이어 이번에는 1천4백년간 유지돼온 낡은 사법 체계를 기습적으로 개혁했기 때문이다.
영국 총리실은 12일 상원의원인 법률귀족 중 총리가 임명해 대법원장·법무장관(검찰총장 겸임)·상원의장 역할을 모두 맡던 로드 챈슬러(Lord Chancellor)란 관직을 폐지하고 헌법부와 법관인사위원회를 신설해 검찰·경찰권과 법관 인사권을 넘겨주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미국식 대법원을 새로 설치키로 했다. 지금까지 상원의원을 겸한 법률귀족들로 이뤄진 대법관사무소가 맡던 대법원 역할을 이관하기 위한 것이다. 블레어 총리는 이 같이 정치와 사법을 완전 분리키로 하고 관련 법안을 올 여름 하원에 제출키로 했다. 또 상원의장직을 신설하는 법안도 여름 회기에 제출할 예정이다.
◆사법개혁=삼권분립이 된 다른 민주국가와는 달리 영국에선 총리가 임명하는 각료 신분의 로드 챈슬러가 사법부의 수장을 맡아 법관 임면권과 인사권을 가지는 등 권한이 막강하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폐지론이 만만치 않았으나 색슨족이 잉글랜드에 정착한 1천4백년 전에 만든 전통이라는 점 때문에 손댈 엄두를 내지 못해 왔다.
블레어 총리 주변의 개혁그룹은 그동안 사법부의 독립이 필요하다며 미국식 법무부를 신설해 검찰권과 경찰권을 넘기고, 독립기구인 법관인사위원회를 만들어 법관의 임면과 인사를 맡기며, 상원에서 최고법원의 기능을 분리해 대법원을 별도로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블레어 정부의 자문인 레너드 피치 경은 99년에는 로드 챈슬러 선출 절차를 엄격히 하자는 절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블레어는 급진적인 조치를 선택했다.
블레어 총리의 오랜 친구로 내무부 사법담당 국무상을 지내고 이번 헌법부의 초대 장관에 임명된 포크너 경은 “법원뿐 아니라 검찰과 경찰 제도도 현대화해야 한다”며 사법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할 뜻임을 분명히 했다. 헌법부는 다음달 구체적인 개혁방안을 발표할 계획이다. 교도소는 지금처럼 내무부가 담당한다.
◆반응=제1야당인 보수당은 반대 입장이다. 보수당은 논평에서 “1천년의 역사가 (총리실의) 보도자료 하나로 사라졌다”며 “사법부를 또 다른 상원의원에게 넘긴 것일 뿐”이라며 이번 조치를 평가 절하했다. 하지만 제3당인 자유민주당은 “현대 민주국가로 가는 길”이라고 환영했다. 인권단체인 리버티의 사무총장인 마크 리틀우드는 “이번 조치는 사법과 정치가 분명하게 분리된 것으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상당수 영국 언론들은 이번 조치를 “국민이 선출하지 않은 상원의원들이 가진 권한을 철폐해 영국을 현대적 민주주의로 바꾸려는 블레어의 상원 개혁 마무리 작업”이라고 평가한다.
진보신문 <가디언>은 “블레어는 1천4백년의 전통을 날려버리고 제도를 바꿔 혁명을 이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블레어의 쿠데타”라는 제목으로 이번 조치를 보도하면서 “의회의 동의를 받지 않고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은 문제”라는 의견을 내놨다.
블레어는 99년 상원을 개혁해 작위를 가진 귀족들이 상원의원직을 세습받는 특권을 없애고 기존의 세습귀족들도 상원에서 내보냈다.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