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행 편도 비행기표를 들고 시집 가던날, 어머니는 너무 많이 울어서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으셨다.
그런 어머니를 뒤로하고 나는 23살 어린 신랑을 따라 영국에 왔다.
그러나 가족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 시집식구들 때문에 외로움을 느꼈다. 한국 사람 한 명 없는 곳에서 학교 다니고 주말에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몸이 힘든 것은 자고나면 괜찮았지만 마음의 상처는 나날이 쌓여 병들고 죽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국인 커플들은 외국에 나오면 서로에게 더 잘하고 더 위로하며 더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았다. 그러나 파아란 눈의 어린 남편은 의젓하긴 했지만 내마음을 헤아려 주지도 배려해 주지도 못했다. 게다가 사고, 행동, 음식, 습관 등 모든 것이 다르다 보니 세월이 흘러도 생소함을 덜어내지 못했다.
10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에도 낯선 나라에서 낯선 사람과 사는 것같아 가끔 흠칫 놀란다. 더없이 나에게 잘해주는 남편이지만 모자라는 공감 때문에 삶은 외롭다.
영국인과 결혼했으니 영국사회에 섞여 살아야 했지만 쉽지 않았다.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은 받아들이고, 그럴 수 없는 것들은 타협하고, 이것도 저것도 안되면 포기하게 됐는데 포기할 때마다 마음에는 앙금이 쌓여갔다. 그렇게 나는 자신과 싸워내며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그러나 영국에 온 지 7년째 나는 절망했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나는 죽을 각오를 하고 나뭇가지에 목을 매었다.
‘엄마가 제일 마음이 아프겠지, 가문에 누가 되겠지,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 하겠지, 더러는 사람들이 나를 가엽게 여겨 주겠지. 아기야 건강하고 예쁘고 행복하고 공부 잘해서 휼륭한 사람이 되어라. 이렇게 슬프고 초라한 엄마가 있는 것은 없느니만 못한걸. 아빠랑 잘 살거라’
그러나 그 마지막 순간에 나는 가지를 잡은 두손을 놓지 못했다. 내가 낳은 아기가 있고 그 아기의 엄마가 되었으니 그럴수는 없었다. 나는 죽지 못했다. 나는 죽을 수 없었다. 아니 너무나 간절히 나는 살고 싶었다.
그때 나는 ‘어머니를 뿌리치고 떠나 왔으면 살아서 행복해야 어머니의 빚을 갚는 것이다. 내가 불행하게 사는 것은 딸의 행복을 바라고 보내준 어머니를 배신하는 것이다. 불행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것은 천륜을 거역한 죄인이 되는 것이다’고 다짐했다.
내 아기 때문에 반드시 살아야 했던 것은 나도 어머니의 아기여서, 그 아기를 위해 희생하며 살아주신 어머니의 딸이어서였다. 살아야 한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 내 아기를 위한 것이고 어머니의 빚을 갚는 것이다.
사람들은 영국에 사는 동안 신나게 살다 간다. 돌아갈 때가 있고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에 행복하게 살다가 간다.
조카들은 고모는 영화처럼 산다고 했다. 아이들은 몰랐다. 어른들만 나를 철없고 무모하다고 했다. 선택과 자유는 책임을 동반하는 법, 가족들은 네가 선택한 인생이니 네가 책임지라고 했다. 그러니 나는 돌아갈수도 머무를 수도 없었다.
한국에서는 손님, 영국에서는 이방인…
요즈음 큰오빠가 오래전 차에서 틀던 노랫가락을 나도 모르게 읖조린다.
클래식 음악가인 내가 저질스런 노래를 듣는다고 쓰레기통에 몰래 처 넣어버렸던 그 노래를 내가 울먹이며 부른다.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을려고 왔던가~
눈물없던 내가, 눈물을 모르던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걸핏하면 눈물이 수도같이 흐른다. 엄마가 그립고, 고국이 그립고, 내 모국어가 그립다. 눈빛만 봐도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그립다.
된장국이 먹고싶고 외로움과 한기가 도는 날은 따끈한 구들방도 뼈저리게 그립다. 흔하고 특별하지도 않아 그 소중함 조차도 몰랐던 것들마저 타향살이의 서러움과 고국의 그리움을 더해준다.
나는 꿈처럼 영화처럼 살고 싶었는데…
나에게 그리움은 불치병인가 보다.
그러나 민들레처럼 이땅에 뿌리없이 내렸어도 나는 민들레처럼 강하게 내 아기의 멋있는 어머니로 살 것이다.
글 : 이선 / 재영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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