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 연설문 전문가에… “국제중 입학에 도움된다” 엄마들 나서며 과열양상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을 둔 권모(여·42)씨는 8월 중순쯤부터 최근까지 다른 학부모들의 전화 공세에 시달렸다. 초등학교 반장, 학생회장 선거에 맞춰 도움을 받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권씨는 “내가 홍보대행사에 다니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학부모들까지 전화를 걸어와 연설문이나 포스터 잘 만드는 법을 부탁했다”고 말했다.
여름방학을 마친 초등학교에 선거 열기가 한창이다. 요즘 초등학교 선거는 친구들 마음을 사려고 자장면이나 햄버거를 돌리는 ‘햄버거 선거’ 수준이 아니다.
알록달록 눈에 확 띄면서도 아이들 솜씨처럼 보이게 만든 전문 제작 포스터에다 대필한 맞춤 연설문까지 등장하고 있다. 시중에는 반장 선거를 위한 ‘리더십 필승 전략서’라고 광고하는 책도 나왔고, 백화점 문화센터에는 엄마들을 대상으로 ‘반장 선거 강의’까지 등장했다.
인터넷에서 ‘POP’라는 손글씨 디자인업체를 운영하는 김모(32)씨는 최근 선거용 포스터와 피켓 주문을 하루 평균 10건 이상 받고 있다고 말했다.
“선거가 있는 학기 초 1∼2주가 피크죠. 내일 당장 필요하다며 한밤중이나 새벽에도 전화가 와요.”
각종 선거용품을 세트로 판매하는 업체도 있다. 12만원짜리 A세트는 피켓 3개, B세트(16만원)는 피켓 3개와 명함 500장, 여기에 어깨띠 5개를 추가하면 26만원 하는 식이다.
서울 S초등학교 임모 교사는 “어제 학생회장을 뽑았는데 11명 후보 중 10명이 전문 업체에서 제작한 포스터와 전단지를 들고 나왔더라”고 말했다.
선거 연설문을 대신 써주는 대필 사이트도 생겼다. 대필 사이트 도움을 받아 학생회장이 됐다는 초교 6년 김지영(가명·12)양은 “주위에 도움을 줄 사람도 없어서 어머니께서 인터넷을 뒤져 돈을 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전문업체까지 동원해 선거에 열을 올리는 것은 초등학교 회장 경력이 상급학교 진학에 도움이 될 것이란 믿음 때문이다.
5일 서울 D초등학교 앞에서 만난 학부모 조모(40)씨는 “딸이 오늘 5학년 부회장에 출마했다”며 “반장을 3년 하거나 학생회장이 되면 국제중 입학 때 가산점이 있다고들 하더라”고 말했다.
J학원 부원장은 “국제중뿐만 아니라 대학에서도 가산점을 주겠다고 하니 회장하고 싶어하는 건 너무 당연하다”고 말했다.
아이들 선거에 전문업체가 개입하고 과열 양상이 빚어지자 아예 선거운동을 엄격히 제한하는 학교도 생겼다.
서울 포이초등학교 권희숙 교감은 “외부업체에 맡길 수 없도록 학교에서 벽보용 용지에 도장을 찍어주고 사진도 학교에서 직접 찍어준다”고 말했다. 대필 연설문의 폐해를 막기 위해 선거 유세 대신 후보 학생과 일반 학생 대표들 간에 토론을 벌이게 하기도 한다. 한양초등학교 이모 교사는 “판에 박힌 연설 대신 각 후보가 공약에 대한 토론을 벌이는 모습을 보고 회장을 선택하게 한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 8일 오후 수원시 장안구 정자초등학교에서 각 어린이회장, 부회장 후보와 친구들이 하교하는 어린이들을 상대로 선거유세를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