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거침없는 행보가 정치권의 낡은 관행을 깨뜨리고 새로운 대통령 상을 제시하고 있다. 역사상 처음으로 당선자가 야당을 찾는 등 여야의 벽을 뛰어넘는 대화정치는 적대적 긴장관계를 누그러뜨리고 있으며, 파격적 소탈함은 대통령과 일반 국민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고 있다.
1월의 어느 토요일 오후, 노당선자는 일찌감치 퇴근길에 올라 명륜동 자택으로 향한다. 오랜만에 맞는 한가함이 어색했는지 노당선자는 경호원들에게 묻는다. “볼링칠 줄 아는 사람 있나요.” 노당선자는 젊은 경호원들과 함께 비원 근처 볼링장에 들러 3게임을 즐겼다. 처음에는 주뼛거리던 경호원들도 승부에 몰두했다. 볼링장 손님들이 신기해하며 구경하러 몰려들었고, 경기가 끝난 뒤 노당선자는 사인을 해주느라 20여분간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교통신호 조작도 삼가라”
이 볼링장은 노당선자가 선거운동을 하느라 들른 곳으로, 당시 “당선되면 다시 찾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로서는 선거공약도 지키고 경호원들과 가까워질 기회를 살리기도 한 셈이다.
노당선자가 3번이나 대중목욕탕을 찾은 일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애초 알려진 것과는 달리 경호원 2명도 알몸으로 탕 안까지 쫓아갔다는 것이 경호 관계자 새로운 설명이다. 그는 “멀찌감치서 경호했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 못 채게 하려는 것도 있었지만, 대통령 당선자와 알몸으로 마주친다는 게 너무 불경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알몸 경호’란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 없는 일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동료 의원들과 골프는 함께 하면서도 몸은 꼭 따로 씻는 것으로 유명하다.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계보의원들과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두자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에 비하면 ‘노무현 방식’은 기존 권력자들의 카리스마를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파격이다.
노당선자는 차를 탈 때 요인경호를 위한 경찰의 교통신호 조작을 삼가라는 지시도 내렸다. “조금 일찍 서둘러 출발하면 되지 시민들 불편을 끼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노당선자가 내세운 이유다. 대신 경호원들의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 빨간 불에 걸려 횡단보도 앞에 멈춰 있다 보면 일반 차량과 나란히 서 있는 경우가 많은데, 경호팀으로서는 초긴장상태에 돌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노당선자가 애초 고집을 꺾고 방탄차량으로 바꾼 이유도 경호원들의 이런 고충 때문이다.
그래도 경호원들은 싫지 않은 분위기다. 노당선자의 예측불가능한 방문이 오히려 위험요소를 줄이고, 미리 현장에 가서 점검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격의 없이 대해주는 노당선자의 친밀함이 이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있다.
노당선자는 경호원들에게 “대통령이 시장을 보러 나왔다든가,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했다든가 하는 장면에서 국민에게 행복감을 줄 수 있다”며 ‘탈권위경호’를 주문하고 있다.
노당선자의 이런 서민적 행보는 비서실에서도 거듭되고 있다.
서갑원 의전팀장은 아침에 사무실로 들어서려다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노당선자가 서팀장의 책상에 앉아 다른 비서실 직원들과 함께 그날의 조간신문 기사를 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어느 날 저녁에는 노당선자가 비서실에 들러 “자, 저 먼저 나갑니다. 다들 퇴근하시죠”라고 말해 편안함을 느꼈다.
말투 흉내내는 개그도 빠르게 등장
최근 노당선자의 말투를 흉내내는 개그맨이 등장한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낙연 대변인은 “이례적으로 빠르게 등장한 것”이라고 말했고, 민주당 한 당직자는 “80년대는 대통령을 흉내낸 개그맨이 방송에 나오지 못했고, 김대중 대통령 때는 임기말에 흉내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아예 취임도 하기 전에 개그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그 자체가 발전”이라고 말했다.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