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장을 잃은 한나라호의 진로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핵심은 누구를 당의 얼굴로 내세울 것이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2003년 1월3일 활동을 개시한 ‘당과 정치개혁을 위한 특별위원회’도 따지고 보면 새 선장을 뽑는 게임의 규칙을 정하고 판을 짜는 기구다. 누구를 내세울지에 대해선 “TK(대구·경북)가 나서서 뭔가 일을 해야 한다”는 ‘TK중심론’에서부터 “한 사람을 얼굴로 내세우는 시스템을 아예 폐지하자”는 미래연대 강경파 의원들의 ‘원내정당화론’에 이르기까지 의견이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새로운 리더십 형성을 둘러싼 양쪽 인식 차가 쉽게 메워지기는 어렵다. 선거 패인에 대한 진단에서부터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이부영 의원은 “지금은 ‘이회창’이라는 강력한 지도력이 없는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진공상태에 빠져 있다. 공기가 채워지는 과정에서 한바탕 소용돌이가 일게 돼 있다.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진단했다. 한 차례 격돌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이다.
정치개혁, 뒷북칠 수 없다
문제를 제기한 수도권 초·재선 의원들도 새로운 리더십을 어떻게 채우느냐가 사태의 본질이라는 데 주목한다. 1월2일 미래연대 비공개 세미나의 최종결론은 민정계 중심의 현행 대의원 구성을 큰 폭으로 변경하고, 전당대회 시점을 3월 중순께로 1개월쯤 연기하자는 것이었다. 지도부 선출과 관련된 민감한 이해관계가 걸린 부분이다. 미래연대 한 관계자는 “당 쇄신의 핵심은 민정계를 얼마나 배제시키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소장·개혁파 의원들은 새로운 리더십 창출 문제를 원내정당화론으로 접근한다. 특위 위원인 안영근 의원은 “당에는 일상적 업무만을 관장하는 5명 정도의 관리형 집단지도부를 두고 주요한 정책적·정치적 결정권을 의원총회에 주자”는 쪽이다. 원내정당화를 지향하면서 당의 얼굴을 아예 내세우지 말자는 것이다. 김영춘 의원도 “원내정당화 같은 혁명적 제도개혁이 아니고는 위기를 타개하기 어렵다는 공감대가 세를 얻고 있다. 개혁특위 논의과정에서 이 문제가 활활 타오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원내정당화론은 일단 원내총무 중심으로 총선을 치른 뒤 차기주자 문제를 논의하자는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
개혁파 의원들이 원내정당화라는 화두를 집중적으로 제기하는 데는 까닭이 있다. 한 미래연대 소속 의원의 얘기에 그 열쇠가 들어 있다. “당의 얼굴이 중요하다. 제도보다 얼굴을 바꾸는 것이 유권자들에게 더 호소력이 있다. 그런데 지금 당의 상황이 합리적이고 순조롭게 뭘 내세울 수 없는 상황이어서 (얼굴을 바꾸려면) 당내 권력투쟁을 수반하게 된다. 국민은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당권투쟁은 싫어한다. 이런 점에서 한 사람의 얼굴을 내세우는 시스템을 폐지하는 원내정당화가 한 방법이다.”
원내정당화는 의원 개개인의 브랜드를 살려주자는 제도다. 개혁파 의원들이 당의 이념적 울타리를 뛰어넘어 소신 있는 발언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민주당의 정동영 의원 등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한다. 그러는 동안 우리 당 초·재선 의원들은 벤치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는 미래연대 어느 의원의 토로에서 알 수 있듯, 당 지도부의 이념적 무게에 짓눌려 정책적 발언을 제약받아온 데 대한 고민이 엿보인다.
개혁파 의원들이 원내정당화에 집착하는 데는 정치개혁이라는 화두를 늘 민주당쪽에 선점당하면서 뒷북만 친 데 대한 반성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야말로 원내정당화라는 문제로 먼저 치고나가자는 것이다. 또한 개혁파의 리더로 내세울 만한 현실적 대안이 부족하다는 점도 고민이었다. 이들이 심정적 교감을 이루는 김덕룡·이부영 의원에게 일사불란한 지지를 보내는 것도 아니다. 이부영 의원도 “내가 정말 필요하다고 해서 징발되면 몰라도 지금 누가 나선다고 될 상황이 아니다”고 말했다.
문제는 현재 한나라당 세력분포에서 현실적으로 이런 주장이 관철될 수 있는가다. 세력으로만 보면 개혁파는 분명히 소수파고 영남쪽이 다수파다. 그래도 김영춘 의원은 “해볼 만한 싸움이다. 다수와 소수의 조직싸움으로 보면 애초 얘기가 안 된다. 누가 더 명분과 논리, 설득력이 있는지가 중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미래연대의 권오을 의원도 “국민이 밀어줄 때 밀어붙여야 한다”고 말한다.
“차라리 개혁파 의원
떠나는 게…”
그러나 당 주류를 자처하는 영남, 그 가운데도 TK쪽 의원들 생각은 다르다. 선거 패인에 대한 이들의 진단은 “보수라는 이념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왔다갔다하면서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을 제대로 추스르는 일은 “보수의 이념적 기치를 더욱 확고히 하면서 일사분란한 모습을 보이는 것”(김만제 의원)이다. 때문에 이들은 대표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는 단일성 집단지도체제를 선호한다. 선거가 1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여러 수단을 동원해 한나라당을 와해하려는 민주당에 맞서려면 일사분란한 지도부가 들어서야 한다는 논리다. 이들은 대체로 ‘한나라당은 영남당이며, 영남당화돼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 이면엔 17대 총선에서도 불리할 게 없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총선 때 “호남지역 대선 득표율을 보라”며 선동하기만 해도 쉽사리 당선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TK의원들은 이번 대선결과에 할말이 많다. 이회창 후보에게 15대 때 72%보다 6%P나 많은 78%의 몰표를 줬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에 따라 일부 의원은 “차라리 개혁파 의원들이 당을 떠나는 게 도움이 된다”고까지 얘기한다. 당의 다선 의원들과 사무처쪽에서도 강력한 권한을 지닌 새로운 리더십을 하루빨리 형성해 권력공백을 메워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물밑에선 구체적인 이름까지 거론하며 분주하게 접촉하고 있다. TK쪽 의원들이 입에 올리는 인물은 강재섭 의원이다. 50대 중반에 4선의 관록과 화려한 경력을 쌓은 그에겐 일찍부터 ‘차세대 TK주자’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대선 패배 직후 강창희 의원과 함께 지도부 총사퇴를 요구하며 발빠르게 최고위원직을 내던진 것도 당권포석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관측됐다. 당내에선 그가 충청권의 강창희, 경남의 강삼재 의원과 함께 ‘50대 강씨 트로이카’를 구축해 당권에 도전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그러나 그에겐 ‘TK주자’라는 꼬리표가 결정적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가 당 전면에 나서는 순간 ‘한나라당=영남당’이라는 세간의 인식을 공식적으로 확인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수도권의 한 초선의원은 “강 의원이 개인적으로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가 당의 얼굴로 나서는 순간 한나라당의 환골탈태는 물건너간다”고 말했다. 국민이 한나라당의 변화를 수긍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전국적인 지명도와 대중성을 갖췄고, 당 개혁을 주장해온 박근혜 의원도 해볼 만하지만 지난해의 탈당과 복당 이력이 흠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병렬 의원도 ‘합리적 보수주의자’라는 이미지와 서울 강남에 지역구를 두고있다는 점 때문에 당의 새로운 얼굴로 거론된다. 그러나 60대 중반(65살)이라는 연령대가 족쇄다. 당에서는 “노무현 후보 당선으로 자연스럽게 세대교체 흐름이 형성된 만큼 60살 이상의 중진들은 전면에 나서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얻어가는 분위기다. 최병렬·김덕룡·이부영 의원은 모두 60대다. 일부에선 파격적으로 40대 지도자론을 얘기하기도 한다. 지난해 5월 지도부 경선에 뛰어들어 나름의 저력을 보여준 김부겸 의원을 주목하는 이도 있다. 40대 중반이지만 그는 아직 초선이다.
한나라당의 분화 가능성
한나라당 내 논란의 두 대립축인 수도권 초·재선 의원들과 영남권 보수파 의원들이 대선 패인 진단과 지도부 구성, 이념적 정체성에 대한 생각의 편차를 극복하고 적절한 타협안을 도출할 수 있을까. 위기에 대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결국 타협안을 모색하리라는 전망이 일단 우세하다. 중진급 의원들이 최고위원직 사퇴와 당권불출마 선언을 통해 기득권을 버리는 모양새를 취했고, 개혁파 의원들을 특위에 대거 포진시킴에 따라 게임의 공정한 규칙을 정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각 차를 극복하지 못할 경우 자칫 파행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북한 핵위기와 이라크 전쟁 등의 국면에서 당의 다수파가 대동단결론을 내세워 대세를 장악하면 개혁과 변화의 목소리는 금세 잦아들 것이기 때문이다. 당 중진들이 벌써부터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와 인수위쪽에 날선 대립의 칼날을 세우는 것도 이런 가능성을 예고한다. 이 경우 한나라당의 분화 가능성도 점쳐진다. 지금의 틀 안에서 근본적 변화를 이뤄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순간 제3의 해법을 모색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민주당의 쇄신과정에서 정치적 원심력이 크게 작동할 가능성도 있다.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