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인 17일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강원랜드. 오후 5시 반밖에 안됐는데 카지노의 슬롯머신 480대는 한 대도 비어 있지 않았다. 사람 없는 자리는 기계가 대신 ‘대리 베팅’하고 있거나, 1000원 지폐와 담뱃갑이 차지하고 있다. ‘앉지 말라’는 카지노식 ‘찜’이다. 어기면 여지없이 말다툼이 벌어진다.
‘왱왱’ 거리는 기계음과 화려한 조명, 매케한 담배연기로 가득한 1천564평 내부는 1천여명이 들어차 있다. 대부분 수수한 옷차림의 40~50대였으며, 20대는 적었다. 하루 평균 2천500여명씩, 작년 한 해 90만명을 넘었다는 말이 실감났다.
2000년 10월 문을 연 카지노는 480대의 슬롯머신과 30대의 테이블만으로 작년 4천955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전체 도박산업 규모(11조5천539억원)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경마·경정 따위보다는 낮지만 강원랜드측은 “올 3월28일 메인 카지노가 개장되면 매출액이 거뜬히 1조를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20분 만에 자리를 얻어 베팅을 시작해봤다. 스위치에 이쑤시개를 꽂아 자동베팅이 되도록 해놓고 40만원째를 퍼붓고 있는 옆자리의 40대 여인은 100원짜리 동전 하나를 넣고 레버 당기는 기자가 안타까운 듯했다. “아저씨, 그렇게 적게 걸면 못 따요. 3배씩(300원)은 해야지….”
매일 10억원 이상을 버는 카지노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악마의 성’이라 불린다.
기자의 베팅도 무엇에 홀린 듯 100원에서 금세 1천500원으로 늘어갔다. 유리용기 속에서 도는 주사위 3개에 돈을 거는 ‘다이사이(일본어 대소·大小라는 뜻)’ 테이블은 액수부터 달랐다. 10만원, 1만원 칩이 수북이 쌓여, 판돈만 1천만원이 넘었다.
딜러가 마감을 알리면 사람들은 쫓기듯 칩을 던진다. 마지막 종이 세 번 울리면 딜러는 말리고 고객은 “받아달라”고 애원한다. 하지만 주사위의 몸부림이 멈춰지기 무섭게 딜러는 칩을 쓸어갔다.
‘한국인은 슬롯머신으로 시작해 바카라로 끝난다’는 게 이곳의 정설이다. 바카라는 카드 2~3장을 받아 9에 가까운 숫자가 이기는 게임으로 “룰이 간단하고 승부도 빨라 한국인 성격에 맞는다”고 딜러는 말했다. 판에 2천만원 가량 걸리는데 1분30초면 승부가 났다.
한국의 도박산업은 매년 30% 가량씩 고속 성장하고 있다. 강원랜드 박도준 부장은 “그간 마카오·홍콩·시드니 등으로 나가던 도박객이 국내로 회귀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 같은 기본 수요에다 동해안·태백산 등의 관광을 연계하는 ‘경유지’로서의 이점, 주5일 근무제 확산이 도박산업 급성장을 부추긴다고 그는 분석했다.
카지노의 승률을 묻자 강원랜드 직원 장욱씨는 “대박이 꽤 터진다”고 말했다. 슬롯머신에서는 작년 10월, 30대 남자가 ‘잭팟’을 터트려 1억8천800만원을 땄다고 한다. VIP룸에서는 바카라·블랙잭 등으로 하루 8억원을 딴 기록도 있다. 카지노 2층의 VIP룸(3개)은 1회 베팅액이 일반 룸의 40배인 2천만원으로 벤처사업가, 변호사, 의사가 주 고객이다.
그렇지만 고한읍 대구탕집 주인 이정화(여)씨의 말은 달랐다. “여름 휴가 때면 5천명씩 오지만 따는 사람은 10%도 안돼요.” 워커힐, 강원관광대학 카지노경영학과 등에서 실력을 닦은 뒤 3교대로 일하는 딜러 수백명을 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딜러 A씨는 “바카라 승패 확률은 산술적으론 딜러가 51대49지만 실제는 9대1”이라고 말했다.
강원랜드측은 “지금까지 한 사람이 잃은 최대 액수는 230억원”이라고 말했다. 고한읍 내에서는 ‘400억원을 잃고 패가망신한 사람이 있다’ ‘1년 동안 여관에서 장기 투숙하고 도박하다 300억원을 날린 부부가 있다’는 구전이 전설처럼 돌아다닌다.
고한파출소 이정석 순경은 “40억원을 잃은 사람을 봤다”고 말했다. 작년 가을, 1년에 40억을 날린 뒤 맨발로 파출소에 걸어 들어와 울먹울먹 ‘파산스토리’를 털어놓은 그는 서울에서 여관업을 하는 30대 남자였다. 이 순경은 “아직도 퀭한 눈빛이 기억난다”고 했다.
완전히 털린 고객에게 고한읍은 1인당 2만원을 준다. 고한~청량리 기차비, 우동 한 그릇 값, 서울 지하철 값이다. 강원랜드측은 “그 2만원을 들고 다시 카지노로 오는 사람이 많아 지금은 ‘각서’를 받는다”고 말했다. 각서를 쓰면 출입이 금지된다. 카지노 내에서 간혹 벌어지는 ‘칩 절도 사건’은 막다른 골목에 몰린 파산자들의 마지막 몸부림이다.
이렇게 돈을 잃고도 일부 ‘중독자’들은 폐장시각인 새벽 6시부터 오전 9시 다시 카지노가 개장할 때까지 노숙자가 된다. 18일 아침에도 카지노 앞에는 숙소 없는 20여명이 맨바닥에 눕거나 기대어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구 5천560명인 고한읍에는 70개의 전당포가 즐비하다. 금, 보석, 외제 시계, 자동차 등을 잡아준다. 에이스전당사 직원은 “외제차는 1천만원까지 주는데 지금은 ‘카드깡’(카드할인)이나 ‘꽁지 돈’(고리대금)을 더 선호해 별 재미없다”고 말했다.
강원랜드는 피해가 늘자 2001년 9월 25일 ‘한국도박중독센터’를 세웠다. 본인, 가족 요청을 받은 출입금지자 명단이 2001년 191명에서 작년 497명으로 늘었고 올해도 21명이 신청했다.
김용세 대전대 교수(법학)는 “정상적으로는 돈을 못 번다는 요즘의 한국사회 풍토가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는 곳이 카지노”라며 “건강도 돈도 가정도 잃는다는 주위의 충고보다 ‘그래도 한탕할 수 있다’는 더 강한 믿음이 이들을 도박으로 이끈다”고 말했다. 그는 “건전한 도덕률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먹혀들어가지 않고 정부마저 과도한 사행성을 제어하는 기능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며 “한 번에 수십억원의 대박이 터지는 로토복권의 인기나 카지노 열풍은 따지고 보면 정부가 부추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