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분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깨끗한 삼 백 육 십 오일을
아무 조건 없이
선물로 주셨습니다.
아름답게
감사하게 쓰겠습니다.
얼마 전 내게 배달되어 온 어느 잡지의 첫 장에 쓰여진 시입니다. 이 시는 짧았지만 그 감동의 여운은 길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 중에서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것이 시간의 선물입니다. 새해가 온다고 들뜨고 소란스러운 나날이지만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생명의 시간을 거두어 가신다면 누군들 새해를 온전히 맞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너나 없이 무심하게 한 해를 보내고 또 그렇게 한 해를 맞습니다. 세파에 시달려 살수록 더 그렇습니다. 그저 달력의 사진과 그림이 바뀌는 것을 보면서 속절없이 또 한 해가 가는구나 하고 느끼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무덤덤하게 새해를 맞을 수 있겠는가.
가슴 시리게 벅찬 감회와 떨리는 손길로 새해 새 달력의 첫 장을 펼쳐보지 않겠는가. 한 시간 한 나절이라도 어린아이가 초콜릿을 아껴 먹듯 그렇게 살려하지 않겠는가. 보다 가치 있고 보다 뜻 있는 시간을 살아가기 위해 골똘하지 않겠는가. 이제 우리 앞에 하나님께서 주신 삼 백 육십 오일의 선물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 선물의 색깔은 하얗습니다. 하얀 선물. 마치 함박눈이 내린 대지의 모습 같은 그런 순백의 색깔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 순백의 색깔 위로 저마다의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야 합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고 나면 비단 시한부 삶을 사는 이가 아니라 해도 그 발자국을 누군들 함부로 찍을 수 있겠는가.
어렸을 적 미술 시간에 하얀 도화지를 앞에 놓고 앉으면 그렇게 가슴이 설렐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모두 어린 소년처럼 하얀 도화지를 앞에 놓고 제각기 삶의 자화상을 그려야 하는 처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 새 날이 밝았습니다. 이 새해를 주신 이가 누군 지를 아는 자들에게 마다 주신이의 목적에 맞게 삼 백 예순 다섯 날을 살아야 하는 의무도 함께 주어지고 있습니다. 새해를 맞아 나는 하얀 도화지를 앞에 놓고 설레던 그 옛날의 소년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이 됩니다.
주님,
주신 이 하얀 공간 위에 제발
함부로 발자국을 찍지 말게 하소서.
지금껏 걸어왔던 것 같은
어지럽고 지저분한 발자국일랑
남기지 않게 하소서.
선물로 받은 이 새해만은 제발
새로운 발자국을 찍게 하소서.
2.
2000년 1월3일 새벽, 잠이 깨었습니다. 새벽이 아니라 한밤중이었습니다. 식구들 모두 잠들어 있는데 혼자 잠이 깨었습니다. 누가 깨운 것 같기도 하고 저 혼자 깨어난 것 같기도 했습니다. 다시 잠을 청했으나 쓸데없는 일이었습니다. 책을 보려 했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뭔가 심각한 결단을 내려야 할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뜻밖에도 기도를 할 마음이 들었습니다. 침대 위에 엎드려 기도를 했습니다. 몇 마디 끙끙거리고 나니 할 말이 없어 졌습니다.
그때, 언젠가 읽었던 법정 스님의 수필 한 편이 생각났습니다. <무소유>라는 제목의 수필이었는데, 그걸 읽으며 감명을 받았기보다 심한 부끄러움과 부러움에 휩싸였던 게 새삼스레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언제까지나 남의 글을 읽고 부러워만 할건가? 좋은 음식이 있으면 먹을 일이요 좋은 옷이 있으면 입을 일이요 좋은 길이 있으면 걸어갈 일이 아닌가? 당신이 버릴 수 있는 게 뭐요? 한번 버려보시지!”
생각은 계속 앞으로 나갔습니다. 나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리해 보았습니다. 맨 먼저 떠오른 것이 아내와 두 아이와 식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은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의 소유는 무엇인가?
나는 어쩌다가 런던 땅에까지 와서 성직자에다 시인이라는 꼬리표까지 달고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장난이 아닙니다. 이 은혜를 무엇으로 어찌 갚는단 말입니까? 나보다 더 일찍 일어나고 나보다 더 많은 땀을 흘리며 나보다 더 추운 저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고개를 번쩍 들고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나는 한껏 겸손하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꾸밈으로서가 아니라 현실로 겸손하는 길밖에는, 이 잘못 돼도 한참 잘못된 세상에서 살아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일까? 생각나는 대로 내 마음의 다짐을 새겨 봅니다.
우선 먹는 것을 귀하게 여기겠습니다. 밥은 한 톨이라도 그냥 버리는 일이 없게 할 것이며 배가 터지게 먹는 일도 없도록 하겠습니다. 음식을 아낄 뿐만 아니라 맛있게 먹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동학교도들처럼 “밥이 하늘입니다”를 주문으로 외우고 다니지는 않더라도 정말 하늘을 모시듯이 밥을 먹겠습니다. 밥뿐 아니라 땅에서 나는 모든 것들을 귀하게 여기도록 힘쓰겠습니다.
그리고 공연히 빈둥거리며 논다든지 오락에 흠뻑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건전한 오락을 즐기는 것까지 삼가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시간을 아끼며 무슨 일이든 일을 꾸준히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나에게 자랑으로 여기거나 우쭐거리는 일은 없도록 항상 조심하겠습니다.
지금 나는 옷이 꽤 많습니다. 꽤 좋은 옷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만하면 족합니다. 이제 앞으로 옷을 살 일이 있으면 적어도 세 번 이상은 생각해 보고 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나는 좀더 철저하게 낮아져야 합니다. 말로가 아니라 몸으로, 생활로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내 머리 위에 쌓여진 이 뜨거운 숯불을 무슨 수로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눈 딱 감고 철면피로 살면 모르겠거니와 조금이라도 양심껏, 사람답게 살고자 하면 참 어렵게 만드는 세상입니다. 감히 고개를 들고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기어야 합니다. 바닥으로 바닥으로 흘러가는 물처럼, 기어 가고 또 기어 가야합니다.
…그리고, 나는 오만하게 살고 싶습니다!
고개를 곧추세우고 콧대를 높이고 모든 것들을 눈 아래 내려다보며 그렇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에 대한 자존심, 내 눈으로도 하늘을 쳐다볼 수 있음에 대한 자존심을 굽히는 일 없이 살아가고 싶습니다.
정말로 나는 오만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를 포함하여 내 선량한 이웃들을 휘몰아쳐 어디론가 끌고 가려는 이 비뚤어진 세태와 조작된 여론과 악마의 유혹에 대하여 나는 코브라처럼 대가리를 곧추세우고 그것들을 눈 아래 내려다보며 거만스럽게 살아가겠습니다.
오! 귀중한 자존심이여!
그날 새벽, 나는 나의 인생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날이 마침 나의 생일이었습니다.
- 김은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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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혁님은 아름다운교회 담임목사로 있으며, 시인,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인간성으로서의 하나님>, 시집 <작은 꽃 한송이 되고 싶구나>,
<그대가 되고 싶습니다>, <기쁨아 너를 부르면 슬픔이 왜 앞서 오느냐>,
<다시 사랑하고 싶다>와 칼럼집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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