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 ‘젊은 한국’을 선택했다.
노무현 당선자의 탄생은 자신의 으뜸 구호대로 ‘낡은 정치 청산’과 ‘새로운 정치’에 대한 민심의 열망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세대별로는 1953년 한국전 종전 이후 출생한 20~40대, 즉 전후세대가 산업화의 역군이었던 50~60대 기성세대에 반기를 든 형국이다. 비단 정치뿐 아니라 사회·경제·문화 전반에 걸쳐 부쩍 성장한 전후 세대들의 영향력과 발언권이 더욱 거세질 것임을 예고해주고 있다.

노당선자의 등장은 또 한국정치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한다. 정치개혁의 발목을 잡아왔던 대명사로 지칭됐던 3김정치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번 대선 과정에서 이미 드러났던 정당의 무력화 현상, 후보 개인의 경쟁력 대결 구도는 정치가 이미 변화의 흐름을 타기 시작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노당선자의 승리는 이미 우리 사회가 격변의 흐름을 타고 있음을 말해준다.
올 8월 중순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 근처의 스타벅스 커피숍. 30~40대 초반인 노당선자 핵심 참모들이 종이컵 커피와 과자 몇조각을 놓고 모여 앉았다. 12월 대선을 어떤 개념으로 치러야 할지 논의하는 자리였다. 당시 반노(반노무현)성향의 민주당 지도부가 이들에게 당사에 사무실을 내주지 않은 탓에 커피숍에서 모인 것이다. 그러나 억눌리고 답답한 당사보다 편안하고 자유로운 커피숍 미팅이 이들의 생각의 벽을 파괴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였다.
당시 논의는 ‘한나라당은 틀림없이 ‘DJ정권 심판’ 등 과거를 향한 선거운동을 할 것” “그런 캠페인은 결국 3김식 네거티브(상대에 대한 비난공세) 선거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거꾸로 가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신물나는 싸움박질만 해온 정치, 권위의 무게에 눌려 숨쉴 공간조차 없는 정치, 지역구도로 모든 게 설명되는 정치를 청산하자”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당사 밖을 떠돌던 이들이 11월에 최종 확정한 구호는 ‘낡은 정치 청산’ ‘새로운 대한민국’ ‘국민후보 노무현’ ‘행복한 변화’ 등이었다. ‘희망’ ‘미래’ ‘밝음’의 포지티브(긍정적) 캠페인이었던 셈이다.
‘노무현’이라는 상품도 이런 구도에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그는 90년 3당합당 때 YS를 따라가지 않았다. 95년에는 DJ의 국민회의 창당 합류를 거부했다. 3김정치에 맹목적인 영합을 하지 않았던 후보라는 세일즈 포인트가 낡은 정치 청산에 설득력을 실어줬다.
지역구도 타파를 외치며 DJ당 간판으로 부산 선거에 출마해 세차례나 낙선했던 당시의 무모함도 이번 대선에선 ‘원칙과 소신’의 이미지로 재활용할 수 있었다. 기존 정치권의 시각에선 노당선자는 변방의 비주류였다. 때문에 “3김 등 기존 정치권에 빚진 일이 없으며 돈과 가신도 없다”는 ‘정치개혁 적임자론’을 가능케 했다.
비록 파경으로 막을 내렸지만 11월15일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합의와 25일의 단일화 성사가 노당선자의 탄생에 결정적 전기가 됐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정후보 측의 여론조사 방식 단일화를 무조건 수용한 노당선자의 승부수였다. 정후보의 승복과 맞물려 두 50대 정치인이 보여준 포장마차에서 ‘소주잔 러브샷’은 노당선자에게 유형무형의 시너지 효과와 지지도 급상승의 선물을 안겨주었다.
11월27일 후보등록 이후 노무현 진영의 선거운동은 자신들의 예상대로 한나라당과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도청문건 폭로를 시작으로 ‘급진·과격·불안의 노무현’ ‘선동에 능한 좌파’ ‘김정일의 대변인’ 등의 구호에 어린이를 태운 난폭 운전사의 버스를 노당선자에 빗댄 TV 광고 등 무차별 네거티브 캠페인이 쏟아졌다.
노당선자 측의 대응은 역시 거꾸로였다. ‘노후보의 눈물’과 ‘기타치는 대통령’ 등 감성을 자극하는 광고로 맞대응했다.
TV 찬조연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한나라당은 김문수 의원을 필두로 현역 의원들을 대거 동원, ‘DJ정권 심판’과 노후보에 대한 흠집내기 폭로전을 집중적으로 폈다.
반면 노당선자 측은 자갈치 아지매,서천의 62세 농민, 에어로빅 강사, 강원대 여대생 등을 현장에서 발굴, 보통사람의 참여라는 차별화로 맞대응해 나갔다.
한나라당 측의 네거티브 캠페인이 별 효과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난 대목은 이번 선거의 가장 주목할 만한 흐름이었다.
인터넷은 노당선자를 낳게 한 또 하나의 주요한 변수였다. 한나라당의 각종 폭로 공세와 일부 강경 보수층의 목소리는 채 반나절도 안돼 인터넷의 바다를 돌고돌아 대부분 조소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오프라인은 조용했지만 노당선자 지지층이 많은 20~30대는 이미 인터넷을 점령하며 대세를 가름하고 있었다.
노당선자의 히트작으로 꼽히는 애니메이션 TV 광고 또한 인터넷 게시판에 한 노당선자 지지자가 올려놓은 만화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었다. 선거자금 모금을 위한 돼지저금통 분양 역시 ‘노사모’ 회원이 인터넷에 올린 아이디어였다. 유권자를 주입식으로 조종하려 했던 게 아니라 유권자의 자발적 기운을 흡수해 재방출한 첫 쌍방향 선거운동의 사례였던 셈이다.
6월의 월드컵 당시 시청 앞에 모였던 붉은 악마의 질서 정연함, 여중생 사망사건에 따른 평화적 촛불시위 등도 노당선자의 승리를 이해하는 하나의 코드가 된다. 노당선자의 한 핵심 참모는 “여러 측면에서 노후보가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는 우리의 메시지와 이런 사회적 흐름이 오버랩되는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고 해석했다.
선거 분석과정에서 간과됐던 하나의 변수는 바로 8월 이후 2개월 넘게 지속됐던 총리 인사청문회였다. 대학 총장·경제신문 사장·대법관 등 우리 사회의 핵심 주류 인사들이 차례로 등장했던 이 자리는 기존 사회지도층의 도덕성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의문을 확산시켰다.
노당선자가 일관되게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허물없는 후보” “등록금, 집마련 걱정 등 누구보다 서민의 아픔을 잘 아는 후보”라고 강조하며 상대를 지칭한 ‘특권층 후보’와 대립각을 세워나간 데에 청문회 신드롬이 영향을 미쳤다는 게 노당선자 측의 분석이다. 노당선자의 승인을 한줄로 정리하면 ‘시대의 바뀐 흐름을 읽고 같은 방향으로 순응했다’는 점이다.
승인은 때론 당선자의 적잖은 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전후 세대의 변화에 대한 갈망과 안정적 국정운영을 바라는 기성세대의 침묵의 소리를 잘 조화시켜야할 새로운 책무가 이젠 노당선자의 어깨에 무겁게 부여된 것이다.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