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근한 팝송 엮어 만든 뮤지컬 유행… 외국 관광객에 인기
영국 런던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인 대영 박물관이나 웨스트 민스터, 버킹엄 궁에 못지않게 영국을 이해하고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뮤지컬이다. 미국 문화에 젖어있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상당수는 ‘뮤지컬’하면 떠올리는 곳이 뉴욕의 브로드웨이지만 사실 뮤지컬의 본고장은 런던의 웨스트 엔드라는 지역이다.
런던의 한 중심지인 웨스트 엔드라는 명칭은 런던의 역사가 시작된 ‘더 시티(The City)’를 기준으로 해서 볼 때 이 지역이 서쪽 끝 부분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비롯됐다.
오늘날 ‘더 시티’는 뉴욕의 월 스트리트와 쌍벽을 이루는 국제 금융 중심지로서의 역할만을 남긴 채 화려했던 대영제국의 심장부, 전 세계에서 온 외국인들로 넘쳐 나는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의 영광은 웨스트 엔드에 넘겨줬다. 레스터 스퀘어(Leicester Square)와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을 두 축으로 펼쳐진 웨스트 엔드는 영국이 자랑하는 대중문화의 중심지다. 이 일대에만 100여 개에 달하는 각종 공연장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고 이 가운데 30여 개의 뮤지컬 극장이 세계 관광객들로 매일 밤 가득 메워진다.
할인 판매소 오전 9시면 장사진
오전 9시, 레스터 스퀘어에 밀집해 있는 할인표(Half-price Ticket) 판매소마다 장사진이 연출된다. 판매소의 창구가 9시30분부터 열리는 만큼 미리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원하는 뮤지컬의 표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넉넉하게 여유를 가지고 예약을 하면 표를 구하는 데 어려움이 없겠지만 대부분 짧은 여행 일정 중에 인기 있는 뮤지컬을 보려는 관광객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판매소가 마지막 희망일 수밖에 없다.
지금도 뮤지컬의 고전인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이나,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또는 요즘 가장 각광을 받고 있는 <맘마미아(Mamma Mia)>, <위 윌 록 유(We will rock you)> 같은 뮤지컬의 표는 최소한 몇 주 전에 예약이 끝난다. 한참을 기다려 차례가 돌아왔건만 자신이 원하는 뮤지컬의 표를 구하면 그나마 운이 좋은 경우이고 상당수는 그 자리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오후 7시, 각 뮤지컬 극장마다 공연 시작 30분을 남겨 놓고 관객들이 몰리기 시작한다. 이 때 제철을 만난 듯 분주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암표상들로 자신이 원하는 뮤지컬을 반드시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세주 같은 존재겠지만 이들이 요구하는 표 값은 턱없이 높다. 대개 사전에 예약한 표 값이 좌석에 따라 우리 돈으로 8만원에서 15만원 정도라면 할인표 판매소에서는 4만~7만원 안팎, 암표상에게서는 20만원에서 많게는 50만원을 줘야 살 수가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매일 밤 뮤지컬 극장들이 만석을 이루는 것을 보면 오늘날 영국인들이 무엇으로 먹고 사는 지를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웨스트 엔드에서 한 해 팔리는 뮤지컬 표가 1천300만장에, 고용 인력 5만여명, 창출되는 부가가치는 연간 4조원이 넘는다는 최근의 조사가 영국 뮤지컬 산업의 파워를 실감하게 한다.
영국 뮤지컬의 르네상스
영국에서 뮤지컬이 태동한 것은 19세기 후반. 17~18세기 절대 왕권 아래서는 귀족적인 성향의 예술풍조가 만연하면서 귀족들의 전유물인 오페라가 발전했다. 그러나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과 함께 서민과 중산층들이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문화적인 욕구가 새로운 형태의 문화를 만들어 내는 원동력으로 작용한 결과 탄생한 것이 뮤지컬이다. 서유럽의 전통적인 오페라 형식에 영국의 셰익스피어적 연극과 각종 쇼적인 요소들이 결합해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서는 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후 영국의 뮤지컬은 당시 식민지였던 미국으로 건너갔고 2차 대전 이후 <아가씨와 건달들>, <왕과 나>, <에비타> 등의 걸작 뮤지컬들이 브로드웨이에서 잇따라 만들어지면서 상업적인 성공을 통해 세계적인 예술로 거듭났다.
이렇게 미국으로 넘어갔던 뮤지컬의 주도권은 1980년대 이후 앤드류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라는 영국의 천재 작곡가가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오페라의 유령>, <캣츠>, <미스 사이공> 등 공전의 히트 작들을 선보이면서 다시 런던 웨스트 엔드로 돌아왔다.
특히 근년의 신경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팝송을 엮어서 만든 뮤지컬들, 예를 들어 스웨덴 출신 4인조 혼성그룹 아바(ABBA)의 히트 곡으로 만든 <맘마미아>와 영국 록 그룹 퀸(Queen)의 <위 윌 록 유>, 허스키한 목소리로 우리 나라에서도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영국 남자 가수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의 노래로 스토리를 꾸민 <오늘 밤이 바로 그 밤(Tonight’s the night)> 등은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키면서 영국 뮤지컬의 르네상스를 확고히 하고 있다.
선술집에서 뮤지컬의 여운 음미
오후 10시30분, 장장 3시간에 걸친 뮤지컬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은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표정들을 한 채 런던의 밤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이들 속에서는 정작 영어를 듣기 어려운데 그만큼 외국 관광객들이 많다는 증거다.
이들은 대개 그 길로 근처의 펍(Pub)으로 직행한다. 뮤지컬 관람의 뒤풀이 장소로는 펍이 제격이기 때문이다. 선술집에 비유할 수 있는 펍은 퍼블릭 하우스(Public House)의 약칭으로 영국인들에게는 맥주를 한 잔 하면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는 곳이고 관광객들에게는 영국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다. 고색창연한 내·외관에다 남루한 가죽 소파 등은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는 영국인들의 특성을 보여준다.
영국의 살인적인 물가에 비하면 펍에서 파는 맥주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이다. 특히 이웃 나라 아일랜드가 원산지이나 영국인들이 가장 즐겨 마시는 흑맥주 기네스는 이 펍에서 제 맛을 즐길 수 있다. 처음에는 혀끝에 와 닿는 씁쓸함이 인상을 찌푸리게 하지만 마실수록 고소하면서도 깊은 맛이 난다. 그래서 기네스의 맛은 영국의 느낌과도 퍽 닮았다.
이런 기네스를 들이키며 뮤지컬 배우들의 현란한 춤과 열정적인 노래, 변화무쌍한 무대, 열광적인 관객들의 반응을 떠올리다 보면 런던의 숨막히는 교통 체증과 변덕스러운 날씨로 인해 쌓인 여독은 눈 녹듯이 사라진다.
해가 지지 않는다던 대영제국의 영화는 이제 더 이상 영국에서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 역사와 문화적 전통이 빚어낸 뮤지컬의 본고장 웨스트 엔드의 해는 아직도 지지 않고 있다.
스카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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