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상 범죄는 미군에 재판권 한·미 약속
지난 6월 의정부에서 여중생 두 명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사건의 파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항의 방문단이 미국 백악관 앞에까지 가서 시위를 했고 국내에서도 연일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왜 사고를 낸 미군에 대한 재판을 한국 법원이 못하고 미군이 재판해 무죄가 내려진 것일까?
또 이 사건으로 주둔군 지위협정(SOFA)이란 단어가 연일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있는데 이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 보기로 하자.
미 80여국서 똑같이 적용…한국만 예외 안돼
한 피해자가 있는데…무죄평결 납득 어려워
1. 숨진 두 여중생은 어떻게 해서 화를 입게 됐나?
지난 6월13일 사고 당시 상황은 그림을 참고하면 알 수 있다. 당시 전차와 장갑차가 앞 뒤에서 어마어마한 굉음을 내며 지나가고 있었다. 문제는 사고가 난 도로의 폭이 너무 좁아 장갑차가 다닐 수 없는 길인데도 무리하게 이 길을 이용했다는 점이다. 신효순·심미선 양은 뒤에서 오던 무한궤도차량을 미처 피하지 못한 걸로 보인다. 사고를 낸 무한궤도차량 운전병은 운전석에선 도로 가장자리에 있던 여중생들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무한궤도차량에서는 관제병이 앞뒤를 관찰하면서 도로 상황을 운전병에게 알려주도록 돼 있는데 사고 차량의 관제병은 여중생을 발견한 뒤 운전병에게 긴급히 연락했지만 통신장비가 고장나 교신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미군 검찰 당국은 두 사람에게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해 재판에 회부했지만 지난달 재판에서 두 사람 모두 무죄 평결이 내려졌다.
2. 피해자가 분명히 있는데 가해자에겐 법적 책임이 없다는 평결은 납득하기 힘들다.
무한궤도차량을 몬 운전병과 관제병에게 무죄가 내려진 이유는 한마디로 말하면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는 것이다.
재판에서 변호인들은 두 사람은 규정대로 무한궤도차량를 운전했고 비상상황에서도 자기 할 일을 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고 주장했는데 배심원들이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미국 재판에서 유죄냐 무죄냐를 결정하는 것은 판사가 아닌 배심원들이다. 통상적으로는 평범한 시민들이 배심원으로 선정되는데 이번 사건은 군사재판이다 보니 9명의 배심원 모두 미군 동료들이었다. 그래서 재판이 시작되기 전부터 결과가 뻔한 재판 아니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게다가 한국과 달리 미국 재판에서는 1심에서 배심원이 무죄라고 평결하면 검사는 더 이상 항소할 수 없도록 규정돼 있다.
무죄 평결이 내려졌다고 해서 이번 사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미국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 주한 미 대사가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유감을 표시한 것을 전달하고 미군이 유족들에게 위로금을 지불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또 재판 직후 좁은 도로로 무한궤도차량 이동을 명령한 지휘관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미군 병사의 주장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는데 미군은 이미 해당 지휘관을 문책했다고 밝혔다.
3. 한국 땅에서 한국인이 숨진 사건인데도 왜 미군 군사법정에서 재판하는가?
SOFA는 주한미군에 대한 법률 적용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한국과 미국 정부 간 약속이다. 그런데 SOFA 22조에는 미군이나 그들의 가족이 공무를 수행하다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미군이 재판권을 갖는다고 명시돼 있다.
이것은 상관의 명령을 엄격히 따르고 전쟁이나 군사작전을 수행하는 군인의 특수성을 고려한 것이다. 여중생 사망 사건도 공무상 범죄로 분류돼 미군 법정에서 재판하게 된 것이다. 만약 미군이 개인적인 일로 승용차를 몰다가 사고를 냈다면 당연히 한국 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을 것이다.
4. 미군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주둔해 있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규정돼 있는가?
미국은 세계 80여개국과 SOFA를 맺고 있는데 범죄를 저지른 미군에 대한 재판을 어느 나라 법원이 할 것인지에 대해선 모두 우리나라와 똑같은 규정을 갖고 있다. 이를 재판 관할권이라고 하는데 이는 미군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원칙이다.
가령, 우리나라도 9·11 테러 이후 미국을 지원하기 위해 의료·수송 지원 부대를 키르기스스탄에 파견하면서 주둔군 지위협정을 맺었는데 여기에는 공무뿐 아니라 비공무 중 범죄에 대해서까지 한국 군인에 대한 재판권은 한국이 갖는 것으로 규정돼 있다한다.
그런데 한·미 간의 SOFA 규정이 미·일 SOFA에 비해 문제점이 많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의 경우 공무인지 아닌지의 판단은 미군 측에 맡겨져 있는데 일본의 경우는 일본 법관의 판단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 두 나라가 협의하도록 돼 있다는 것이다.
5. 여중생 사망 사건을 계기로 SOFA 조항들을 개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은데 앞으로 어떻게 될까?
공무 중 범죄에 대한 재판권을 한국 정부가 넘겨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현실적으로 이뤄지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한국에만 예외를 인정해 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행 SOFA에는 비공무 중 범죄의 경우도 일방적으로 미군에게 유리한 불평등 조항이 있다는 지적이 많다.
SOFA의 부속문서인 합의의사록에는 한국이 재판권을 갖는 범죄라 하더라도 한국은 미국의 요청이 있을 경우 특히 중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판권을 행사할 1차적 권리를 포기한다고 규정돼 있는데 미국 측 요청이 대부분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 결과 지난해 발생한 주한미군 범죄에 대해 한국이 재판권을 행사한 경우는 겨우 7%에 그쳤다.
이 밖에 미군 범죄가 발생했을 때 한국의 경찰관이나 검사가 현장에 접근하고 용의자·목격자 등 사건 관계자를 조사할 수 있도록 이른바 초동수사 참여에 관한 조항을 확실히 보장받아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해외미군 19만명 한국 등 30여국 주둔
미국은 한국을 포함해 세계 30개국에 약 19만명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다. 또 비록 미군이 주둔해 있지는 않지만 미국과 각종 군사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도 50여개국에 이른다.
미군의 해외 주둔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시작됐다. 2차대전을 치르면서 유럽과 아시아 등 세계 각지에 파견했던 미군 중 일부를 전쟁이 끝난 뒤에도 현지에 그대로 남겨둔 것이다.
미군이 주둔한 나라들도 공산주의의 확산 방지를 내세워 미군의 계속적인 주둔을 허용했다. 1950년 한국전쟁과 64년 베트남전, 91년 걸프전을 거치면서 해외 주둔 미군 병력은 계속 늘어났다.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