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국교정상화(1965년 6월22일) 40주년을 이틀 앞둔 20일 저녁. 막 정상회담을 끝낸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청와대 상춘재에서 만찬을 가졌다. 그러나 그 흔한 건배사조차 없었다. 참석자들에 따르면 두 정상은 만찬 1시간45분 동안 시종 무겁고 냉랭한 분위기를 연출했다고 한다. 농담이나 웃음은 거의 없었다.
만찬 분위기는 수교 40주년을 맞은 양국관계의 현주소를 그대로 반영했다. 아울러 두 나라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주기에 충분했다.
양국관계를 수교 이후 최대위기로 몰아넣은 것은 과거사 문제다. 1965년 수교 이후 활발한 경제협력이 이뤄졌지만, 일본이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아 양국관계는 항상 ‘불씨’를 끌어안고 위태위태한 줄타기를 해왔다. 양국은 과거사를 접고 미래지향적 관계를 설정하는데 한발씩 나아갔다. 1983∼84년 전두환 대통령과 나카소네 총리의 첫 국가원수 상호방문, 1996년 김영삼 대통령과 하시모토 총리의 제주 정상회담 및 한·일월드컵 공동개최 결정 등은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총리 사이에 맺어진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양국관계는 과거사에 발목이 잡혔다. 원인을 제공한 쪽은 물론 일본이다. 2001년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과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양국관계를 급랭시켰다. 한동안 잦아들었던 일본 보수우익 지도층의 망언도 잇따랐다. 노대통령이 2004년 제주 한·일정상회담에서 “임기중에 과거문제 언급않겠다”고 약속했으나, 올 초에 터진 후소샤 왜곡교과서와 시마네현 의회의 ‘독도(다케시마)의 날’ 제정은 노대통령으로 하여금 ‘외교전쟁’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두 정상은 20일 회담에서 역사인식에 대한 간극을 조금도 좁히지 못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신사 참배와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해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1983년 나카소네 총리의 방한 때 서울시내에는 일장기가 나부꼈으나, 고이즈미 총리의 이번 방한 때는 반일시위가 서울시내를 뒤덮었다. 양국관계가 최소한 20년 이상 후퇴한 것이라는 평가다.
양국의 역사인식 차이는 앞으로도 쉽게 좁혀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인 견해가 앞선다. 일본은 한국이 제시한 해법(진실규명→사과반성→보상배상→용서화해 4단계)에 아무런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가 이번 정상회담에서 “어떤 나라와 나라의 관계에서 의견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고 말한 데서 일본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때문에 한·일관계는 노대통령이 고이즈미 총리에게 ‘경고’한 것처럼 앞으로 조그마한 계기가 있어도 폭발할 소지가 다분하다.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