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래요, 봄입니다. 봄.
하늘도 봄이고
땅도 처녀들 가슴도 봄입니다.
나의 사랑 공원으로 가요.
그 공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작은 강,
어느 곳 하나
예쁘고 정답지 않은 곳 없지만
나의 사랑 공원처럼 여리고 수줍고
아름다운 곳은 없을 겁니다.
그 공원, 그 작은 강가에
흐드러지게 핀 봄꽃에
봄 햇살이 반짝입니다.
모처럼 햇살 따뜻한 봄 날씨입니다. 따뜻한 봄볕에 더욱 화사해 보이는 뒤뜰의 꽃들을 보면서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꽃들이 한가지씩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봄볕에 은근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그 봄꽃들을 보면서 ‘내게 어울리는 봄꽃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대에게 어울리는 봄꽃은 무엇입니까?
2.
60평생 시 짓는 일로 침식까지 잃었던 명나라의 시인 동라석(1438-1534)은 67세에 연하인 왕양명을 만나 비로소 ‘깊은 잠에서 번뜩 깨어나는’ 느낌을 받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껏 내가 밤낮으로 시에 몰두했던 일은 그 동안 나 자신이 경멸하던 저 세속의 이익과 명예에 긍긍하는 무뢰배들이 하는 짓과 다만 맑고 흐리다는 차이가 있었을 뿐 본질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만약 공자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의 인생은 덧없이 끝날 것이다”
시인이 명예나 재물 따위를 노려 시를 쓴다면 저잣거리의 무뢰배 따위와 무엇이 어떻게 다르겠느냐는 것입니다. 동라석은 그 길로 자기보다 14살이나 어린 왕양명을 스승으로 모시게 됩니다. 옛 사람들의 엄숙하고 단호한 구도의 길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라석이 왕양명을 만남과 마찬가지로 시를 잃어버리고 있는 나를 일깨워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하고, 다시 시를, 사람을 사랑할 용기를 주는 기쁨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대가 그 기쁨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3.
어느 중년남자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전쟁을 겪고 지지리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난 그런 전형적인 우리 아버지 세대였습니다. 그는 그때 철로 변에서 살았는데 저녁이 되면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들어 가봤자 밥도 없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패고 누나는 양공주가 되고 그런 집안이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우울해서 철로 변에 앉아 있으면 노을이 졌습니다.
저녁이면 철로 변에서 노을을 바라보던 그 소년은 자라서 자수성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압구정동에 넓은 아파트도 사고 사업도 번창하고 자식들도 공부 잘하고 마누라도 착하고 하지만 그에게 한가지 병이 생겼습니다.
출장을 다녀오거나 회사 직원들을 데리고 야유회를 갔다 오다가도 철로 변에 있는 노을만 보면 그는 며칠씩 우울증에 빠지곤 했습니다. 회사도 안 나가고 밥도 먹지 않고….
정신과 의사의 치료법은 한가지였습니다. 그에게 철로 변 노을 속으로 다시 들어가 그 속에서 즐거운 추억을 다시 만들도록 했습니다. 맑은 날로 도망치는 것도 철로 변을 떠나는 것도 도움이 안됩니다. 그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노을 속으로 다시 들어가서 노을을 다시 사는 것입니다.
모두에게 노을과 같은 존재가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대가 그 노을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4.
살아오는 동안 마음을 늘 열어놓고 살아 온 셈인데 얼마 전부터 닫혀 있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외국에 오래 산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살면 살수록 마음의 문이 열려야 하는데 반대로 마음의 문이 닫힌다는 것이 그렇게 마음 아플 수가 없습니다. 날씨에도 맑은 날이 있고 흐린 날이 있듯이 사람의 마음도 열었다가 닫았다가 할 수 있을 터인데 그런데 이번의 닫힘은 마치 비오는 날만 계속되는 개일 줄 모르는 영국 날씨와도 같습니다.
살아온 경험으로는 이 마음의 닫힘이 쉽게 열릴 것 같지 않아 내 자신이 비참한 생각이 들어 창피한 얘기지만 눈물까지 흘리곤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닫힌 마음을 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대는 그대의 닫힌 마음을 열고 싶지 않습니까?
5.
지금껏 어렵사리 나를 지탱시켜 준 것은 끊임없는 거짓말로 세상을 속이는 일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거짓 위에 터한 생활이었고 속임수에서 속임수로, 은폐에서 은폐로 이어지는 어둠의 세월이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나를 가장 견디기 힘들게 한 듯 한데, 가깝고 먼 사람을 두루 속이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비참한 노릇인지는 경험해본 사람만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나는 비록 사람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한이 있다해도 속이고 감추는 생활을 계속할 수는 없다는 생각일 뿐이요, 더 큰 잘못, 더 큰 거짓을 저지르고 있는 중인지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로되 어쩌랴, 이렇게 꿈틀거리면서 더 이상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거나 상처를 입히는 일이 없게 되기를 빌 따름, 아니 좀 더 작은 상처를 입히게 되기를 빌 따름입니다. 그대도 함께 빌어 주지 않으시렵니까?
6.
나에게는 친구가 몇 명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지! 그들은 내가 잘못을 저지르려고 할 때 충고를 아끼지 않는데 막상 잘못을 저지르고 난 뒤에는 무조건 나를 편들어 줍니다. 세상이 열 두 번 뒤집어져도 내 편입니다.
나에게는 친구가 몇 명 있습니다. 그들이 잘못을 저지르려고 할 때 나는 걱정스러워하며 권면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막상 잘못을 저질러 개잡놈이 된다면 나는 그 때문에 오히려 그들을 껴안을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나의 그런 친구를 생각하면 눈물겹게 고맙고 또 고마울 따름입니다. 갑자기 무슨 힘이 솟아나는 것을 느끼게도 되니 이래서 사람 살아가는 것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라고 하는 것일까. 나는 그대에게 이런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그대도 이런 친구가 되고 싶지 않습니까?
오늘도 말이 많습니다. 말이 많은 날은 늘 서글픕니다.
아주 오랜만에
아름다운 공원을 가로질러
꿈속으로 들어가 추억들을 만났다
추억들은 커다란 술병에 들어 있는
어떤 뿌리들처럼
상하지 않는 싱싱함이다
기억하는가
한때 내 잔의 크기는
아주 컸지만
이제는 내 꿈만큼
작아져 버렸다
말을 많이 하고 돌아오는 날은
언제나 쓸쓸했다
혼자 돌아오는 길은
더욱 쓸쓸했다.
- 김은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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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혁님은 아름다운교회 담임목사로 있으며, 시인,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인간성으로서의 하나님>, 시집 <작은 꽃 한송이 되고 싶구나>,
<그대가 되고 싶습니다>, <기쁨아 너를 부르면 슬픔이 왜 앞서 오느냐>,
<다시 사랑하고 싶다>와 칼럼집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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