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평균 소득 3배 빚 400만명 추산, 소비자 부채 1조파운드… 5월 총선 앞둔 정부 늑장 대처
영국이 신용불량자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연 평균 소득보다 3배 정도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이 40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또 전체 소비자 부채도 1조파운드, 우리 돈으로 1950조원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대책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높으나 오는 5월 총선을 앞둔 정부는 늑장을 부리고 있다.
23세 직장여성 엘리자베스의 경우를 보자.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가계 점원으로 일하면서 신용카드를 발급받았다. 고급 옷 몇 벌을 사고 멋진 식당에서 식사하니 신용카드 현금서비스 한도액을 몇 배 초과했다. 돈을 갚기 위해 신용카드 몇 개를 더 만들었지만 이것으로도 매달 돌아오는 이자를 낼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고리 대금업자를 찾아 빚을 갚았으나 더 큰 문제가 생겼다. 월 평균 20%가 넘는 이자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는 또 다른 고리대금업자를 찾았고 지난 3년간 이런 악순환이 이어졌다.
빚 독촉 때문에 육체·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소비자 신용불량 상담실을 찾았다. 상담원을 만나 그간의 고통을 털어 놓았고 아무런 소득증명서 제출도 요구하지 않고 그에게 신용카드를 발급한 금융기관도 성토했다.
엘리자베스는 아직도 부채에 허덕이고 있다. 연 소득이 7000파운드, 약 1400만원에 불과한 그녀는 현재 2만5000파운드의 빚을 지고 있다. 월급을 받아봤자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를 갚기에도 부족하다.
신용불량자들이 늘고 금융기관이 무책임한 대출을 일삼는다는 비난이 일자 실태 조사가 실시됐다. 애비내셔낼은행에서 임원을 지낸 앤서니 엘리엇은 소비자 신용불량 상담실을 찾은 고객과 심층 면접을 벌였다. 또 금융기관 대출 담당자들과도 만나 자세한 내용을 파악했다.
전직 은행 임원인 그가 파악한 내용도 소비자 불만과 아주 비슷하다. 신용카드를 남발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책임있는 대출제도를 확립하는 것이 시급함을 절실하게 느낀 엘리엇은 다음과 같은 대책을 건의했다.
첫째, 카드 소유자의 동의 없이 현금카드 서비스 액수를 늘리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할 것.
둘째, 모든 금융기관이 부채상담 창구 개설을 의무화할 것.
셋째, 신용평가사들이 대출자의 기존 부채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것.
넷째, 연 소득과 대비해 빚이 과도한 것을 알고도 대출하는 것을 불법으로 할 것.
그는 지나친 부채가 육체·정신적 건강에 미치는 영향도 추가로 조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소비자 상담실에서 만난 신용불량자는 매달 돌아오는 이자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호소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거나 약물을 복용하기도 했다.
여야 정당은 시급한 대책 마련에 입을 모으고 있다. 여당인 노동당이 발의한 소비자신용법안이 현재 의회에 계류 중이다. 이 법은 대출 사기를 엄격히 조사할 것과 함께 조기상환 때 규정을 어겼다며 돈을 더 내라고 요구해온 관행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제2야당인 자유민주당도 과도한 소비자 부채가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지적한다. “400만명이 넘는 신용불량자 때문에 이자율이 0.25%만 올라도 신용불량자가 급증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부는 다소 느긋하다. 오는 5월 총선이 있어 법안 통과를 선거 뒤로 미루는 분위기다.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판에 표를 잃을 수도 있는 법안을 애써 빨리 통과시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무책임한 대출 때문은 아니겠지만 영국 금융기관들은 지난해 사상 최고의 이윤을 기록했다. 우리나라에도 진출한 HSBC는 지난해 90억파운드(약 19조원)의 이윤을 올렸다. 창립 140년 만에 최고 액수다. 애비내셔널이나 냇웨스트 은행도 엄청난 돈을 벌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소비자 대출에서 돈을 버는 비중이 얼마 되지 않는다며 신용불량자 급증과 이윤의 증가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경기 호황에도 불구하고 신용불량자가 급증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들 금융기관이 무책임한 대출을 일삼았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파이낸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