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먼저’ VS ‘인권 우선’ 표대결
올해 초부터 영국에서 격렬한 찬반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전자신분증 도입 문제가 최근 내무장관 교체를 계기로 다시 한 번 여론을 들끓게 했다. 전자신분증 정책을 적극 추진했던 데이비드 블런킷 전 장관이 여자친구의 보모에게 비자를 급행으로 발급해 줬다는 구설수에 휘말려 낙마하자, 반대파들이 신임 찰스 클라크 신임 장관에게 재고를 요청했다. 하지만 클라크 장관도 전자신분증 정책을 계속 이어나가겠다고 밝혔고, 지난 20일에는 하원에서 관련 법안을 놓고 표결이 벌어졌다.
◇ 전자신분증 법안 = 영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전자신분증은 이름, 생년월일, 국적, 이민 여부, 주소와 사진이 기록되고, 본인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방법인 생체인식 정보를 담은 마이크로칩이 내장된다. 지문이나 홍채모양 등 생체 정보는 개인마다 달라서 복사나 복제가 어렵다.
이처럼 한장의 카드 안에 여러 개인 신상정보가 담기기 때문에 관련 자료 접근권을 누구에게 허용할 것인지도 민감한 문제다. 정부가 마련한 법안을 보면 승인된 정부 기관이 개인의 동의를 얻은 뒤 자료를 볼 수 있는데, 경찰이나 정보기관, 국세청, 범죄예방을 위한 정부기구 등은 개인 동의 없이 자료를 이용할 수 있다.
◇ 2008년부터 공식 발급 = 영국은 2008년부터 이 신분증을 공식 발급할 계획이다. 블런킷 전 내무장관은 2011~2012년께 전자신분증을 의무화 하도록 의회가 법안을 처리해 주기를 바랐지만, 국민 80%가 새 신분증을 가질 때까지는 의무화하지 않겠다고 말해왔다.
◇ 찬·반 주장 = 전자신분증 도입을 추진하는 정부는 안보문제를 가장 큰 이유로 내세운다. 영국에서 신분증 없이 또는 가짜 신분증을 쓰며 활동하는 테러리스트나 각종 조직범죄를 사전에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점점 늘어나는 이민자 관리 측면에서도 불법 이민자들이 몰래 들어와 사라지는 것을 막고, 고용주가 불법으로 이들을 고용하는 것도 막을 수 있다고 정부는 주장한다. 또 신분증 도난을 막고, 복지나 의료 서비스 등 공공 서비스를 제대로 자격을 갖춘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힌다. 실용적 관점에서 국민은 더 편하게 신분을 증명할 수 있고, 디지털 시대에 맞춰갈 수 있는 황금 기회라는 의견도 있다.
반면 인권단체 등은 전자신분증 도입으로 안보 강화보다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만 더 심해질 것이라며 반대한다. 테러 조직은 매우 치밀해서 신분증만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며, 불법 이민자들을 더욱 음지로 숨게 해 위급상황이 생겨도 병원이나 경찰을 찾지 못하게 돼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소수 민족이나 유색인종을 구별해 차별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지문이 닳아 없어졌거나, 눈에 장애가 있어 홍채 인식이 어려운 경우 생체정보 전달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무엇보다 신분증에 내장된 마이크로칩에는 점점 더 많은 개인 정보가 담기게 되고 더 많은 곳에서 신분증 제시를 요구할 것이므로, 사생활 침해 소지가 높다는 점도 지적된다.
이를 두고 각 단체별로 다른 관점을 보이고 있다. <BBC> 방송이 분석한 자료를 보면 법조계는 전자신분증 도입 효과에 회의적이다. 이들은 경찰이 개인 신분 확인 자체에 어려움을 겪는게 아니라, 범죄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입증하는 데 어려움 겪는 것이라고 본다. 정보위원들은 정부는 개인정보를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정보 보호 관련 장애물은 극복가능한 것이라며 찬성론을 편다. 하지만 정신 질환을 다루는 쪽은 정신질환자들에게는 카드 발급을 아예 안하거나 서비스 접속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금융·산업계는 개인 확인을 더 철저히 할 수 있게 되므로 적극 찬성한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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