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태어나 시민권을 얻었거나, 국내에 있는 부모의 도움으로 외국에 오래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입영 연기 대상자로 간주될 수 없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법원은 또 병역 면제의 기준은, 외국 영주권이나 시민권 보유 여부와 상관 없이 ‘가족과 함께 실제로 외국에 거주했느냐’가 돼야 한다는 해석을 제시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재판장 유남석)는 20일 미국 시민권자인 박아무개(29)씨가 “징병검사와 입영 연기 신청을 거부하고 현역병 입영 처분을 내린 것은 부당하다”며 서울지방병무청장을 상대로 낸 현역병입영처분 등 취소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병역법에 정한 ‘국외에서 가족과 같이 영주권을 얻은 사람’은 ‘가족과 같이 국외에 체류하면서 영주권을 얻은 사람’으로 봐야 한다”며 “‘가족과 함께 실제로 외국에 체재, 거주한 사실이 있느냐’가 병역 면제의 기준이고, 영주권은 그 표지의 하나일 뿐”이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국내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부모의 도움으로 유학했고, 단지 외국에서 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시민권을 얻은 경우에는, 병역법 시행령의 적용을 받는다고 볼 수 없다”며 “병역법에는 ‘병역의무자 또는 부모가 영주권자’인 경우나 ‘이중국적자로서 국외 10년 이상 체류’한 경우 국외여행허가를 받아 입영을 연기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지만 박씨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법원이 병역법상 외국 시민권자의 국외여행허가와 징병검사, 입영 연기 대상자에 대해 판단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최근 번지고 있는 부유층의 ‘원정출산’ 붐에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는 이번 판결과 관련해 “기존 대법원 판례는 국외영주권자 외에 미국 시민권자를 징병검사나 입영 연기 간주자로 볼 수 있는지는 판단하지 않았다”며 “이번 판결은 원정출산으로 외국에서 출산한 아이들을 한국에서 길러봐야 병역 면제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해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이어 “18살 이전에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미국 시민권자라도 병역 의무를 져야 한다”고 밝혔다.
ㄷ화학공업 창업주의 아들인 박씨는 1975년 부모의 유학 중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시민권자가 됐고, 이듬해 부모와 함께 한국에 들어와 살다가 중학교 3학년 때 혼자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했다. 지난해 2월 결혼 준비를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가 출국금지 조처를 당한 뒤 신체검사를 받은 박씨는 3등급 판정을 받고 병무청으로부터 현역병 입영 처분을 받자 “징병검사를 연기해주지 않고 이어 현역병 입영 처분한 것은 부당하다”며 소송을 냈다.
- 한겨레 10월2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