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건 듣는 노래지,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남 몰래 흐르는 눈물…
비 내리는 가을날
노래 잘 부르는 이들의 노래를 듣고 있다
나는 왜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할까
아내는 환상에 젖어
눈 내리 감고 젖어 있다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노래를 듣는 아내는
어젯밤 침대에서 떨어져
이빨이 흔들거리는 아들아이 걱정하다가
아직 잠이 올 때마다
엄마를 찾는 딸아이 걱정하다가
멀리 계신 부모님 걱정하다가
친정 아버지 눈 수술은 무사히 끝났는지…
앞으로의 생활 아니 생존을 걱정하다가
지금 아내는 노래를 들으며 젖어있다
창 밖, 사람들의 거리에도,
나의 사랑 공원에도 비가 내리고 있다
문득 비를 맞고 걷고 싶다
텅 빈 공원 한가운데 서서 소리치고 싶다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부르고 싶다
하늘까지 닿게 부르고 싶다.
<나의 시 ‘남 몰래 흐르는 눈물’ 전문>
가을인데, 미치도록 시린 푸른 하늘이 그리운 계절인데, 비가 자주 옵니다. 창 밖으로 내리는 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서성거리다가 또 바라보다가 서성거리다가 문득 아득한 옛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20대 초반 신학교 시절, 한번은 부천 외삼촌 집에 갔다가 마침 비가 오는 지라 외삼촌의 긴 가죽장화를 구두대신 신고 학교로 갔는데 어쩌다가 집으로도 외삼촌 집으로도 못가고 며칠을 학교 주변에서 맴돈 적이 있었습니다. 비가 그쳤지만 집엘 가지 못했기 때문에 줄창 가죽장화를 신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어느 날 점심시간이었던가, 도서관에서 어슬렁 거리는데 지금은 이름도 생각나지않는 이쁘장하게 생긴 한 여학생이 다가오더니,
“왜 늘 장화만 신고 다니지요? 이렇게 무더운 여름철에…”
그 말하는 투가 빈정거리는 것은 물론 아니요 궁금해서 묻는 것도 아닌 듯 하고 뭔가 참 그럴 듯이 재미있는 까닭이 있지 않을까 제 마음대로 추측하고는 이 괴짜같은 녀석의 입에서 무슨 대답이 나오는지 어디 한번 들어보자는, 그런 투였습니다.
그때 내 대답이.
“비가 오니 장화를 신지요.”
“비가 오다니요?”
“It’s always raining in my heart.”
내 마음 속에 언제나 비가 내린다는 이 구절은 그때 열심히 들여다보던 영시집에서 읽은 스윈번인가 하는 시인의 한 넋두리였는데 마침 용케 생각이 나서 땜질하듯 내뱉었더니 아마도 그 한마디가 여학생의 풋풋한 젖가슴에 무슨 화살인양 박혔던가봅니다. 그것을 빌미로 둘은 데이트 비슷한 것까지 시늉을 하다가 마침내 내가 군대로 가는 바람에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거나 말거나 요즘 내 마음에도 역시 내리는 비가 그치지를 않으니…
비오는 날
우산도 없이
젖은 머리 흩날리며
뛰어온 그대와
마주쳤을 때
반가운 말보다
마음이 먼저
속삭이는 소리
그래, 참 이쁘구나
참 이쁘구나
<나의 시 ‘비오는 날’ 전문>
영국에는 참 지겹도록 비가 많이 옵니다. 특별히 겨울철과 봄철은 유난히도 비가 많이 옵니다. 한국에서처럼 계속해서 쏟아 붓는다든지 하는 비는 없고 대부분이 가랑비처럼 조용히 내리다가 그치고 또 내리다가 그치고 하는 약간은 낭만적인 비가 내리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대부분의 영국사람들은 비가와도 우산을 쓰지 않고 그냥 비를 맞으면서 걷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비는 사람들에게 색다른 정서를 선사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비가 오면 평소와는 다른 기분이 되곤 하거니와, 문학이나 음악, 영화 등에서 비를 소재로 다루는 작품이 퍽 많은 것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비오는 날에 느끼는 정서나 기분은 어떤 것들일까? 재미있는 건 비는 계절에 따라서 그 느낌이 꽤 다르다는 점입니다.
먼저 봄비는 조금 섬뜩하지만 그래도 매서운 맛은 없습니다. 특히 봄비는 그치고 나서의 느낌이 무척 좋습니다. 봄비가 그치면 응달에 마지막으로 남은 눈이 녹아 흐르고, 마른 잔디도 푸른빛이 어려 옵니다. 그래서 봄비는 생명다움을 가장 아름답게 실현시키는 생명의 선구자와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름에 내리는 비는 봄비와 많이 다릅니다. 하늘이 검은 구름으로 가리고 바람 한점 없는 날, 나무도 풀도 사람도 지쳐서 축축 늘어진 오후, 후둑후둑 쏟아지는 한줄기 소나기는 천지의 지친 심신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여름비는 고약한 데가 있습니다. 영국 소설가 서머셋 모엄은 ‘Rain’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원시적인 자연력의 악의를 느낄 수 있었다. 퍼붓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 쏟는 홍수와도 같았으며 비 자체가 분노를 품고 있는 듯했다.”
가을비는 느리고도 구슬픈 음악 같습니다. 딱히 슬픈 사연이 없어도 가슴을 후비는 첼로의 나즉한 선율처럼 애절함으로 마음을 적십니다. 혹은 지난날 가슴 아팠던 일들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새록새록 되살리기도 합니다.
폴 베를렌느의 시가 있습니다.
거리에 비가 내리듯
내 마음에 눈물 내린다
가슴속에 스며드는
이 설레임은 무얼까
아, 대지에도 지붕에도 내리는
빗소리의 부드러움이여
메마른 마음에 내리는
비의 노랫말이여
머슥한 이 마음에
영문 모를 비가 내린다
웬일인가, 미련도 없는데
이유 없는 이 슬픔은
까닭 모를 슬픔에
더욱 가슴 저며
사랑도 미움도 없는
내 마음 이렇듯 괴로와라
한편 비는 기쁨을 극적으로 고조시키기도 합니다. 영화 <쇼 생크 탈출>에서는 주인공이 갖은 고생 끝에 감옥을 탈출하고 나서 퍼붓는 비속에서 감격해 하는 명 장면이 나옵니다. 역시 비속에서 삶의 환희가 배가되어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것입니다.
비는 사계절 저마다 우리에게 다른 정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 사람의 기쁨이나 슬픔과 함께 하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비는 앞만 보고 치달리느라 빡빡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정서와 삶을 풍부하고 깊이 있게 하는 것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먼 이국 땅 영국에서 지겹도록 자주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한 번쯤은 감상에 젖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비 그치고
나는 당신 앞에 선 한 그루
나무이고 싶다
내 전생을 푸르게, 푸르게
흔들고 싶다
푸르름이 아주 깊어졌을 때쯤이면
이 세상 모든 새들을 불러 함께
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류시화의 시 ‘비 그치고’ 전문>
- 김은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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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혁님은 아름다운교회 담임목사로 있으며, 시인,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인간성으로서의 하나님>, 시집 <작은 꽃 한송이 되고 싶구나>,
<그대가 되고 싶습니다>, <기쁨아 너를 부르면 슬픔이 왜 앞서 오느냐>,
<다시 사랑하고 싶다>와 칼럼집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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