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일씨 사건에 대한 미숙한 대응으로 외교통상부가 정치권과 여론의 강한 비판을 받게 되자, 외교부 내에서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자가 진단과 함께 자탄 및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 “어쩌다가 이렇게 됐나”
많은 외교부 직원들은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된 데 대해 “이런 일은 어쩌면 예견됐던 일인지도 모른다”며 여러가지 문제점을 제기했다. 한 사무관급 외교관은 “아마 어떤 외교관이 <AP>통신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어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외교관은 “고시를 치러 들어온 외교관들은 엘리트 의식이 강하다”며 “외교관들이 해외에 나가면, 교민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따로 지내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외교관들은 다른 나라 외교관들이나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 굵직한 현안들만 다루려 할 뿐, 현지 교민들에 대한 보호관리 업무인 영사업무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분위기가 김선일씨 피랍사실을 확인해 달라는 AP통신의 전화를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 한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해외근무를 앞두고 있는 한 외교관은 “외교관들의 미국 일본 등 주요국 선호경향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외교관은 “외교관들 중에서 아랍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해도 자신이 아랍어를 잘 한다는 사실을 숨기려는 것이 지금 외교부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도 그랬지만 지금도 우리 외교는 미국 일본 등 주요국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어 그런 지역 근무경력이 있어야 핵심 보직을 맡을 수 있다”며 “그러다 보니 외교관들이 아랍어를 한다고 하면 중동으로 배치될 것을 우려해 말을 안한다”고 했다.
경력 20년 이상의 한 외교관은 “군의 힘이 강하던 5공화국 때부터 외교부가 여러가지 수난을 겪었지만, 전화 한 통화 때문에 이런 일을 겪는 것은 처음”이라며 “이 사태가 어떻게 수습될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지었다.
◆ 자성의 목소리
이번 사태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외교부의 국장급 간부는 “외교부의 무사 안일주의가 이번 사태의 한 원인이다. 외교관들은 외무고시에 합격한 후, 자기 계발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번 일이 정말 외교부를 혁신하는 계기가 되지 않으면 유사한 일이 또 발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국장급 외교관은 “일은 많이 늘어난 데 비해 예산과 조직이 뒷받침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외교관들 스스로의 자세에 대해서도 나이순으로 반성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 “억울하다”는 하소연과 불만도 제기
베이징에서 개최된 3차 6자회담에 참석했던 한 외교관은 “오랜 노력 끝에 미국과 북한이 우리 정부의 안을 받아들여 상당한 진전을 이루고 왔는데 본부의 사정이 너무 어려워서, 회담이 잘 됐다는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이긴 하지만, “외교부가 힘이 없는 부서다. 그래서 이렇게 당하고 있다(부이사관급 외교관)”는 불만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