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주 아끼는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몇 해전 벼룩시장에서 구한 그림입니다. 영국에 와서 어려울 때마다 옛일을 생각게하고 다시 용기를 주는 민들레꽃 한 송이가 그려진 판화입니다. 가로 5cm 세로 8cm 정도의 아주 조그마한 소품입니다. 하지만 내게는 그 어떤 그림보다 크고 풍성하게 보이는 귀중한 것입니다.
군복무시절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배치된지 한달 쯤 지난 어느 봄날입니다. 군대 생활의 고달픔과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낼 때였습니다. 일과 시간 중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막사 뒤편 평소 사람들의 발길이 닫지 않는 곳으로 우연히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함성을 지르고 말았는데, 그곳은 그 이후로 제대할 때까지 내 유일한 안식의 공간이었고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까지도 그 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설레는 그런 기쁨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민들레 때문입니다. 평소에 그렇게도 좋아하던 민들레가 한 송이도 아니고 두 송이도 아니고, 황금빛으로 활짝 핀 민들레가 무더기로 피어있는 것이었습니다. 한 20여 평은 실하게 됨직한 풀밭에, 아직 다른 잡초들은 이제야 겨우 머리를 내밀고 있는 판인데 황금빛 민들레가 여기저기 무더기로 피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민들레 하면 고작 길섶이나 언저리에 겨우 발붙여 피어나는 메마른 민들레만 보아왔고 그런 민들레만 생각해 왔었는데, 뜻밖에도 이렇듯 소담하게 피어난 민들레 꽃무더기를 보게 될 줄이야, 너무 흥분해서 내가 지금 군인이라는 사실도, 아직 작대기 하나인 새까만 졸병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다 나중에 기합을 받았을 정도였으니, 그때 내가 받은 감격이 어느 정도쯤 됐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날 이유로 나는 틈만 나면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민들레가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대화 상대자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민들레는 꽃을 피우기 위하여 뿌리를 땅에 깊이 박고 잎을 땅바닥에 찰싹 붙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꽃줄기를 하늘을 향해 뻗치고 거기 꽃이 피어나면 그 꽃은 몸 전체를 하늘을 향해 똑바로 내민다는 것입니다.
또 민들레는 꽃이 핀 다음에도 해만 지면 다시 움츠러들어 봉오리 형태가 되고, 밤이 지나 다시 해가 떠올라 줘야 다시 활짝 피어나는 꽃이라는 것입니다. 이점은 참 놀라운 이치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민들레는 해질 무렵에 하얗게 피어났다가 해만 뜨면 오므라드는 달맞이꽃과는 정반대의 생리를 가진 꽃이라는 것입니다. 달맞이꽃이 ‘어둠 지향적인 꽃’이라고 한다면 민들레는 가히 ‘밝음 지향적인 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해를 그리는 같은 꽃이라 해도 해바라기처럼 해 따라 돌아가다가 막판에 가서는 볼장 다 봤다는 폼으로 머리를 숙여 버리는 그런 꽃이 아니라, 민들레는 아주 철저하게 땅에 발을 붙이고서 하늘만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하늘을 사는 꽃이라는 것입니다.
또 민들레는 두 번 꽃을 피운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황금빛 꽃을 피우다가 시들해지면 다시 봉오리 형태로 움츠러들어서 어둡고 답답하고 외로운 속에서 남몰래 새로운 꽃을 만들어내는 사이에 꽃줄기는 황금빛 꽃을 피웠을 때 보다 거의 갑절로 커집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 문득 하얀 민들레꽃으로 피어납니다. 하얀 꽃이 활짝 피어나면 그 순간 꽃잎들은 하얀 삿갓을 쓰고서 바람 따라 세월 따라 이리저리 날아가 버립니다. 끝에 조그만 씨를 하나씩 달고서.
그렇습니다. 민들레는 하늘로 가기 위하여 이 땅에서 사는 꽃입니다. 그런데 하늘로 올라간 민들레는 그냥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바람 따라 세월 따라 이리저리 불려 다니다가 한여름 땡볕, 한겨울 매서운 추위도 다 견디고 이른봄에 흙끼 조금 얻어 구차하게 피어나는 꽃입니다.
이 민들레! 그 생태가 어찌 그리 반만년 세월을 길섶에서만 살아온 우리 민족의 그것과 닮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내내 민들레야말로 우리 민족의 아픔과 설움을 가장 잘 대변하는 꽃이니 만큼, 민들레 혼을 내 혼에 실어 <민들레처럼> 살아가리라고 마음에 다짐하였고 또 다짐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외국 생활의 어려움이 아무리 우리를 옥죌지라도 민들레처럼 그렇게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집 앞 잔디밭이나 공원에 끈질기게 피어있는 민들레를 바라보면서 용기를 얻습니다. 희망을 발견합니다.
누가 알랴.
그대 소리 없는 웃음의
뜻을.
끝모를 황토 바람
가시나무 숲에
그 누가 알랴.
오오, 그대가 뿌리는
수천 수만의 꿈을.
어찌 차마 그 입으로 말할 수 있으랴.
그대 이 시절에 피어나는
꽃이기 전에
밤보다 더 짙은 어둠을
적시는 눈물이었나니.
아아, 민들레처럼, 민들레처럼,
민들레처럼…
<민들레> 양성우
- 김은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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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혁님은 아름다운교회 담임목사로 있으며, 시인,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인간성으로서의 하나님>, 시집 <작은 꽃 한송이 되고 싶구나>,
<그대가 되고 싶습니다>, <기쁨아 너를 부르면 슬픔이 왜 앞서 오느냐>,
<다시 사랑하고 싶다>와 칼럼집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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