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만에 부활하는 ‘국민 신분증’을 두고 영국이 시끄럽다.
여권, 신용카드, 운전면허증 등이 신분증 기능을 수행해 온 이 나라에서 ‘별도의’ 신분증 도입을 다시 추진하고 있는 정부쪽 움직임이 논란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신분증 제도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도입됐다가 1952년 비효율적이고 경찰과 국민의 관계를 손상시킨다는 이유로 윈스턴 처칠 당시 총리에 의해 폐지됐다.
데이비드 블렁킷 영국 내무장관은 지난해 11월11일 의회에서 신분증 도입과 관련된 법안의 뼈대를 발표했다. 토니 블레어 총리는 지난해 신분증 도입을 우선처리 과제로 설정했으며, 엘리자베스 여왕도 지난해 말 연설에서 신분증 도입을 주요 처리 안건으로 언급했다. 90년대부터 몇차례 도입을 시도했다가 여론에 밀려 수포가 된 신분증 부활을 위한 영국 정부의 가시적인 행보가 빨라지면서 반대여론도 들끓고 있다.
영국 정부는 이런 신분증을 2007년부터 발급하기 시작해 2013년에는 인구의 80%가 지참하도록 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신분증 발급 비용은 약 30억파운드(6조원)로 추산되고 있다.
영국 정부는 도입 이유에 대해 “테러와 불법취업, 이민 관련 불법행위, 조직범죄, 신원 위조 등 영국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각종 범죄와 심각한 문제를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반면, ‘리버티’와 ‘프라이버시 인터내셔널’ 등 인권·시민단체들은 “비용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민권에 진정한 위협이 된다”며 “신분증은 우리를 시민이 아닌 용의자로 만들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운전면허증 등 대체 신분증이 있는데다 독일이나 스페인 등 신분증을 의무적으로 휴대하도록 하는 나라들이 테러범 체포에 남다른 효율성을 발휘했다는 통계가 없다는 점도 반대 근거다. 또 이 신분증 도입으로 소수민족 차별이 더욱 심해질 수 있다는 점도 반대 이유로 들고 있다.
이에 따라 영국 언론과 인터넷에서는 이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진보적 색채의 〈가디언〉은 신분증 도입이 인종차별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며 ‘올해의 악인은 약자를 괴롭히는 블렁킷 장관’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내보냈다.
보수적인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 홈페이지가 지난해 11월부터 찬반투표를 벌이고 있는 ‘신분증 도입 토론방’에서는 5일 현재 60 대 40으로 도입 찬성 쪽이 앞서고 있는 상태다.
영국에서 신분증 도입 시도는 90년대 중반 존 메이저 보수당 총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메이저 총리의 시도는 반대여론에 부닥쳐 백지화됐다. 2001년 9·11 동시테러 이후에 블레어 총리가 신분증 도입을 들고 나왔으나, 인권단체뿐 아니라 여당인 노동당 안에서도 반대가 심해 무산됐다. 이라크 침공 이후 지지율도 떨어지고 테러 공포에 사로잡히게 된 블레어 정부가 ‘국면 전환용’으로 다시 신분증 도입에 도전장을 던졌다는 게 영국 언론의 분석이다.
그러나 불법난민 색출에 열을 올리는 보수당과 달리 노동당은 여전히 내분이 일고 있다. 또 막대한 비용을 문제삼는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 등 정부 안에서조차 찬반양론으로 나뉘고 있어 시행에 적지 않은 진통이 예상된다.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