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드라마·영화·인터넷·책·음반 등에서
대중을 사로잡은 문화 아이콘들
사극은 우리에게 무엇이더냐?
채옥은 달리고 장금은 썰었다. 왕과 후궁, 권신들의 권력 암투가 아닌, 역사를 소재로 하되 새로운 미학과 상상력을 실험한 사극들이 2003년 열풍을 일으켰다. ‘폐인’들을 잠 못 이루게 했던 <다모>는 무협지를 보는 듯한 낯선 액션과 화려한 영상, “아프냐? 나도 아프다” “나는 너에게 무엇이더냐” 같은 절제된 하오체 대사, 비극적인 사랑으로 열렬한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시청률 50%의 벽을 뛰어넘으며 올해 최고의 드라마로 떠오른 <대장금>은 궁중요리 신드롬을 만들고 나서, 현재 정치 상황을 빗대어 읽는 ‘대장금 달리보기’라는 새로운 유행으로까지 이어졌다. 두 드라마는 조선시대 ‘보통 사람들’을 중심에 세워 <장희빈>과 <왕의 여자> 같은 ‘전통적인’ 사극의 실패와 대조를 이뤘다. 특히 ‘비천한’ 신분에 아픈 사연을 안고 있는 여성이 노력과 실력으로 굴레를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줬다. 곁가지 하나, 영·호남 사투리로 신라와 백제의 대결을 희화한 또 하나의 사극 <황산벌>에서 ‘거시기’보다 더 강렬한 것은 “호랑이는 가죽 땜시 디지고, 사람은 이름 땜시 디지는 거여!”라는 계백 부인의 한마디다.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냐”
영화 <살인의 추억>을 510만명이 보았다. 34살 봉준호 감독은 겨우 두 번째 장편인 이 영화에서 끔찍한 미해결 사건인 ‘화성 연쇄 살인사건’의 언저리에 있었던 형사들과 용의자들, 주민들의 모습을 통해 무기력하고 암울했던 그 시대를 정교하게 묘사해냈다. 송강호를 비롯한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냐” “향숙이가 파르르 떨더라” 같은 대사를 기억에 남기며. 또 <살인의 추억>이 결국 ‘5공화국’ 시절의 모순과 부조리 등을 겨냥했던 것처럼 30~40대 감독들이 현대사의 금기를 다룬 영화들을 잇따라 만들었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효자동 이발사> <노근리 다리> <그때 그사람(들)> 등이 개봉했거나 제작 중이다.
젊은 감독들이 재능이 빛을 발한 한해였는데, 봉준호(<살인의 추억>), 박찬욱(<올드보이>), 장준환(<지구를 지켜라>), 임상수(<바람난 가족>), 이재용(<스캔들>) 등이 스크린을 장악했다. 한국영화 점유율이 49.94%에 이르러 스크린쿼터 축소 압력을 가중시키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일찍 일어나면 인생이 확 바뀔까
새삼스럽게 ‘아침형 인간’이 서점가의 화제가 됐다. ‘일찍 일어나 열심히 살자’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담은 <아침형 인간>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아침형 인간으로 변신하라> 등 아류작까지 쏟아졌다. 불경기와 경쟁제일주의가 개인을 외길로 몰아가는 불안 속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사람들의 심리가 그만큼 절박했다. 어쨌든 때아닌 새벽 출근 열풍과 학원 새벽반 수강 열기도 나타났다고 한다.
이처럼 출판계 불황 속에서도 그나마 팔린 책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설득의 심리학> <2막> <한국의 부자들> <나의 꿈 10억 만들기> <메모의 기술>처럼 갑갑한 현실을 벗어날 비법을 줄 것 같은 자기계발서들이었다. 참고로 인터넷서점 알라딘이 집계한 올해 가장 많은 책을 판 국내 저자 1·2위는? 토익 교재 ‘토마토 시리즈’의 오혜정과 토익 시리즈를 쓴 이익훈이었다. 살아남으려면 일찍 일어나 토익 공부를 해라
안녕! 3부작
2000년대 초반을 뒤흔들었던 거대한 두 영화 <매트릭스>와 <반지의 제왕> 시리즈가 요란스럽게 막을 내렸다.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되었던 이 영화는 1편을 보고 나면 2·3편을 보기 위해 자동적으로 영화관에 줄을 서는 거대한 마케팅 효과를 만들어냈고, 많은 문학·철학적 참고서들을 찾아보게 했으며, 대중문화 전반에 파장을 일으켰다. 두 시리즈의 ‘대결’은 <반지의 제왕>의 판정승으로 마무리되었다. 국내외 철학자들의 논쟁거리가 되었던 <매트릭스>의 2편과 3편이 올해 5월과 11월에 개봉했지만, 현실을 다시 보게 하고 선택과 숙명의 문제를 고민했던 1편 이상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고, 대신 물량 강박증을 보여주는 값비싼 액션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절대반지를 버리러 가는 긴 여정도 끝에 이르렀는데, 이미 전 세계에서 1천만권 넘게 팔린 검증된 원작을 무리 없이 화면에 옮긴 감독 피터 잭슨은 ‘뉴질랜드 총리설’이 나올 정도이고, 영화의 오지였던 뉴질랜드는 떠오르는 스튜디오와 관광지가 되었으며, 판타지 열풍 역시 식지 않았다.
양현석:박진영=세븐:비
올해 대중음악은 지독히 안 팔렸다. 10만장 넘게 음반을 판 뮤지션을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 속에서 나름의 활약을 보여준 것은 프로듀서로 변신한 양현석과 박진영 두 사람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출신의 양현석이 이끄는 연예기획사 YG패밀리와 엠보트, 일명 ‘YG사단’은 세븐, 휘성, 빅마마, 거미, 렉시 등 빼어난 R&B와 힙합 뮤지션들을 키워내 좋은 성적을 냈다. ‘예쁘지 않은’ 여성 4인조 빅마마와 세븐은 1집 음반을 각각 20만장, 15만장 넘게 팔았고, 휘성의 2집 음반도 25만장 이상 나갔다. ‘YG사단’의 오랜 일원인 지누션, 원타임, 스위티도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YG사단’과 쌍벽을 이루었던 것은 박진영의 JYP엔터테인먼트. 이곳의 오디션에서 뽑히고 훈련받은 비, 별, 노을 등이 인기를 얻었고 특히 비의 활약이 대단했다. 양현석과 박진영이 키워낸 뮤지션들이 깨우쳐준 것은 더 이상 기획이나 외모, 춤실력만 있으면 노래를 못해도 가수를 할 수 있는 시대는 갔다는 것. 가창력 있는 가수들을 중심으로 가요계가 재편되고 있다.
통하였느냐?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카피 ‘통하였느냐’. <스캔들>의 흥행몰이와 함께 ‘통하였느냐’ 또한 대박을 터뜨렸다. 부부가 아닌 남녀가 관계를 가질 때 ‘정을 통하다’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그동안 ‘통하다’는 남녀관계에서 부정적 의미로 쓰여왔다. 그러나 엄격한 조선시대에 기획 연애를 일삼는 주인공들이 나오는 영화에서 ‘통하였느냐’는 더 이상 무겁거나 딱딱하지 않았다. 금지된 욕망의 출처를 가볍게 풍자하는 새로운 감성이 덧붙여졌다. 이는 중산층 부부의 외도가 정면으로 드라마에 등장하고, 시어머니·며느리·남편 가족 모두 바람 피우는 영화가 만들어지고, 스와핑이 이뤄지는 사회 분위기를 표현하는 압축어이기도 했다. 또한 ‘차떼기’ ‘채권책’ 같은 범죄가 만연한 타락한 현실에서 이 사극풍 대사 한마디는 배신과 냉소의 의미를 전하기도 했다.
잘먹고 잘살자
자연·건강·안정·행복·평화. 불황을 뚫은 건 이런 키워드였다. 정신적·신체적 평온을 뜻하는 웰빙(well-being)의 소비문화는 뉴욕에서 날아와 한반도를 강타했다. 고기 대신 생선과 채소를 먹고, 패스트푸드점 대신 유기농 샐러드바를 찾는 사람들이 늘었다. 담배와 술을 피하고 땀 흘리는 격한 운동 대신 요가와 명상, 아로마테라피를 통해 정신적·신체적 건강을 추구하는 붐이 불었다. 식품뿐 아니라 의류·가전·화장품·부동산·여행 등 각종 산업 분야에서 소비를 선도하는 웰빙족의 번성과 더불어 웰빙 라이프 스타일을 내세운 월간지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잘먹고 잘살며 삶을 즐기는 것을 공식처럼 주입하는 웰빙 마케팅은 새로운 명품족만 양산할 뿐, 본래 조화와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웰빙의 정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가도 공존했다.
얼굴이 짱이야!
올해 인터넷을 달군 최대 유행어는 ‘얼짱’. 얼굴이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일컫는 얼짱은 인터넷과 디지털 카메라의 위력과 맞물려 열풍이 되었다. 인터넷에 개설된 얼짱 관련 사이트는 수천개가 넘으며, 아기 얼짱, 아줌마 얼짱, 애견 얼짱 선발대회까지 열린다. 아예 렌즈를 시선 위 이마 부분에 맞춰 턱선이 가늘게 나오는 얼짱폰까지 출시됐다. 인터넷 얼짱 출신 박한별이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얼짱은 넷(net)을 넘어서 스포츠짱, 노래방짱 같은 변형어가 쏟아졌으며 농구선수 신혜인, 골프선수 안시현 같은 스포츠 스타들도 얼짱 대열에 끼게 됐다. 좋은 머리보다는 좋은 몸(얼굴)을 물려주는 게 후손에게 득이 된다는 요즘 시대에, 얼짱은 외모지상주의를 심화시킨다는 비난과 10대 스스로 스타를 만들어낸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전국구 후보 1번 이효리?
1년 넘게 신동엽과 쟁반을 맞던 이효리는 이제 야당의 총수로부터 “20·30대를 뛰어넘어 40대에게까지도 고른 인기를 누리는 전문 분야의 성공한 여성”이라는 평가에 ‘영입인사 1호’로 대접받기에 이르렀다(물론 농담이었겠지만). 그는 핑클에서의 ‘공주 이미지’를 벗고 노래와 춤, 연기, 외모, 말솜씨 등을 뽐내는 만능 엔터테이너로 변신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털털함과 섹시함이라는 상반된 매력을 동시에 갖추어 새로운 섹시 코드로 주목받았다. TV의 각종 오락 프로그램을 휩쓸고 이효리 한 사람만을 겨냥한 프로까지 제작됐다. 그의 말투, 옷입는 방법 등은 일거수일투족이 상세히 전해지며 ‘이효리 따라하기’ 신드롬을 낳기도 했다. 과도한 ‘효리붐’에 반발해 이효리의 안티팬들은 ‘최악의 뮤지션’으로 몰아붙이기도 했지만, m.net 뮤직비디오페스티벌의 ‘최고인기 뮤직비디오상’, KMTV 코리안뮤직어워드 대상, 서울가요대상 등을 휩쓸었으니 2003년이 이효리의 해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청계천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7월1일 청계고가 철거는 단순히 토목공학적 사건이 아니었다. 도시와 환경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는 사회문화적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카메라를 들고 평소 눈여겨보지 않던 남루한 도시의 일상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반세기 넘게 도시의 닫힌 하수구였던 청계천은 ‘문화상품’으로 거듭났다. ‘다시보는 청계천’ ‘물 위를 걷는 사람들’ ‘다시 열린 개천’ 등 올 한해 청계천의 역사와 미래를 다룬 전시가 많이 열렸고, 도시와 공간을 작품 주제로 내세우는 작가들이 주목받았다. 건축·조경계에서도 청계천 복원 관련 프로젝트 제안이 줄을 이었다. <청계천을 떠나며> <한양 이야기> <신서울기행> <서울도시계획이야기> 같은 서적도 잇따라 나왔다. 그런가 하면 수표교·광통교 등 청계천 유물의 발굴과 복원, 청계천 일대 재개발의 속도 방식을 둘러싼 논쟁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역설적으로, 청계천 복원은 ‘성장의 노폐물’로 여겨졌던 고가 밑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과 끈질긴 생명력을 돌아보게 하는 전기를 가져왔다.
쿨~하게, 쿨~하게
배우자가 바람나도 징징대지 않고 자신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찾아 떠나는 여자, 마음에 둔 상대방이 딴 남자에게 정신팔아도 원한 품지 않고 척척 도와주는 남자. 한해 동안 우리에게 다가온 이런 이상적인 인물상을 우리는 ‘쿨하다’라고 표현한다. <싱글즈> <옥탑방 고양이> <바람난 가족> 등에서 우리를 매료시켰던 인물들의 기본적 태도는 ‘쿨’이다. “열정의 감각을 필요한 순간에 발휘할 수 있는 신비스러운 자기 포장술”, 쿨은 광고·패션·드라마·영화 등 대부분 문화 산업분야에서도 대세가 됐다. 일상에 찌들지 않고 게임하듯 의연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각박한 현실에서 박박 기는 사람들에게 동경을 일으킨다. 그래서 쿨은 “현재의 쾌락에 치중해 불확실성과 낮은 기대치 속에서도 일상을 견디게 하는 기제”로서 실업이 가중되고 점점 노동이 유연화돼가는 한국 사회를 읽는 코드이기도 했다.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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