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로 들어 서면, 갑자기 길거리에서는 영국 어린아이들이 커다란 인형을 앉혀 놓고 돈을 구걸한다. 이 인형과 아이들의 구걸은 모두 11월5일 가이 폭스 데이(Guy Fawkes Day)의 풍속이기 때문이다. 불꽃과 모닥불로 온 밤을 밝히는 가이 폭스의 날에 화형식에 처해지는 인형의 제작비는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받아야 한다는 풍습 때문에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잔돈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이 폭스라는 인형 앞에는 대개 “가이에게 적선 좀 하세요(Penny for Guy)”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그러니까 흉측하다 못해 동정심까지 유발하는 이 인형의 이름이 바로 ‘가이’이다. 차리고 있는 행색이 분명 성인도 아니고 왕도 아닌 이 가이 폭스가 도대체 무슨 대단한 죄를 지엇길래 해마다 이런 수모를 당하는 것일까? 1605년 가톨릭 신자인 가이 폭스와 그의 일당은 제임스 1세 국왕과 국회 의원 등 모든 요직의 인물들이 모이는 국회 개회식날인 11월5일 국회 의사당을 폭파시키기로 합의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국왕의 신교 옹호 정책에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이 폭스의 주도하에 약 30배럴의 화약과 도화선 등을 의회가 열리는 방 아래에 설치하는 데까지 성공한다. 그러나, 자신의 친척이 이 폭발로 다칠 것을 염려한 카톨릭교의 한 멤버가 그의 친척에게 11월5일 의회에 참석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이 편지를 의심한 그 친척과 동료들이 국회 의사당을 수사한다. 마침내 지하에서 화약통을 쌓아 놓고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던 가이 폭스는 체포되고 만다. 결국 불운의 가이 폭스는 다음 해 1606년 1월31일 우리의 능지처참격의 사형을 당하여 생을 마감한다. 1605년의 이 사건은 지금도 매년 11월 영국 정기 국회 개회식날 아침이면 재현되고 있다. 런던 탑에 가면 빨간 제복에 튜더 시대의 멋진 의상을 걸치고 관광객들의 사진 촬영에도 곧잘 응해 주는 비프이터(Beefeater)라는 왕실 위병이 있다. 유명한 런던 드라이 진의 상표에도 등장하는 이 위병들이 비프이터 즉 소고기를 먹는 사람으로 불린 것은 예전에 소고기를 봉급으로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쨌든 이들이 개회식 아침이면 국회 의사당으로 불려 와서 1605년과 똑같이 등불을 켜고(전깃불이 환히 켜져 있는 21세기라는 것은 완전히 잊은 사람들처럼) 제 2의 가이 폭스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지하를 수색한다. 침입자나 폭약 등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국왕에게 들어 와도 안전하다는 전갈을 보내야만 국회 개회식의 주요 절차인 시정 연설을 위해 여왕이 들어 온다는 이야기이니 가이 폭스의 계획이 당시 영국 왕실에게 꽤나 겁을 주기는 준 모양이다. 그래서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부지한 제임스 1세는 그 안도와 환희로 1607년 11월5일을 공휴일로 정하고 큰 모닥불을 피워 기념하였다. 이 공휴일 제도는 빅토리아 시대에 이르러 폐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후부터 매년 11월5일에는 가이 폭스의 인형들을 화톳불에 태우고 불꽃놀이를 하며 이 날을 기념해 왔다. 이러한 행사들 중에는 체계적인 대규모 행사들도 있고 가족과 친구들이 마련하는 사적인 소규모 행사들도 있다. ‘가이 폭스의 밤’은 ‘화톳불의 밤’, 또는 ‘불꽃놀이의 밤’이라고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