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호 태풍 ‘매미’는 9월20일 현재 전국적으로 130여명의 사망·실종자와 4조7810억원의 재산피해, 1만2000여명의 이재민을 낳았다. 정부는 ‘완벽한 재해 예방’이니 ‘소방방재청 신설’ ‘특별재해지구 선포’ 등 요란한 대책들을 내놓았지만 사람들은 또다시 재해가 닥치면 이번 같은 피해가 반복되는 건 아닌지 걱정한다.
이번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정부의 재해대응 시스템에 대한 총체적인 점검과 개선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피해자의 상당수가 뒤늦은 경보와 체계적이지 못한 구호 과정에서 어이없이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매미’에 강타당한 일본에서는 단 1명의 사망자와 9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하는 데 그쳤다. 미국에선 ‘매미’ 못지않은 강력한 허리케인 ‘이사벨’이 동부지역을 강타했지만 9월22일 현재 30명이 사망하고 수십억 달러의 재산피해를 입는 데 그쳤다. 게다가 인명피해는 대부분 교통사고가 원인이다. 미 당국이 허리케인이 상륙하기 3~4일 전 해당지역에 대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주민 30여만명에게 강제 대피명령을 내리는 등 대비를 철저히 했기 때문에 이 정도의 피해에 그친 것이다.
반면 한국에서 발생한 ‘매미’로 인한 피해는 상당 부분 인재라고 볼 수 있다. 지난해 태풍 ‘루사’를 겪은 뒤 감사원은 10월부터 올 1월까지 정부의 자연재해 대비 실태에 대한 감사에 착수해 그 결과를 통보했다. 거기서 제기된 문제점이 어느 정도 개선만 됐어도 이번의 피해는 절반 이상 줄어들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당시 감사원은 행정자치부(이하 행자부) 등 76개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방재, 기상, 하천 등 분야별로 문제점을 지적하고 시정을 지시했다. 방재 분야의 경우 인위 재난을 총괄하는 중앙안전대책위원회와 자연재해를 총괄하는 재해대책위원회가 비상설기구로 돼 있어 기획 조정 평가 등 예방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데다 업무가 중복되고 효율성도 떨어지므로 재난·재해 관리 전담기구를 둬야 한다고 지적됐다. 그러나 재난관리를 총괄하는 소방방재청 신설은 ‘매미’를 겪고서야 서두르고 있다. 지난 5월 행자부는 이미 ‘소방방재청 신설법(안)’과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안)’을 준비했으나 내부 및 관련 부처간 갈등으로 입법이 지지부진했다. 부서간의 주도권 다툼으로 명칭이 재난관리청에서 소방방재청으로 바뀌고, 소방공무원만의 독립이 검토되는 등 4개월여간 우여곡절을 겪다 이번 태풍 피해를 계기로 당초 입법안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쨌든 정부는 이번 정기국회에서 관련법안이 통과되도록 할 계획이다.
‘매미’ 겪고 부랴부랴
‘소방방재청’ 추진
재해통보 시스템은 당장 개선해야 할 부문. 223개 시·군·구의 재해상황 자동 음성통보 시스템의 재해 통보 소요시간이 짧게는 31분, 길게는 12시간으로 평균 2시간33분이나 돼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신속한 연락을 위한 종합무선체계도 갖춰야 한다는 지적이 지난해 6월 국무조정실 감사에서부터 나왔지만 일부 기관에서 사업 시행 방침이 결정되지 않아 도입이 늦춰지고 있다.
기상 분야의 경우 기상청 기상레이더가 내용연수가 초과된 구형이어서 오차범위를 벗어난 관측 결과를 내놓거나 고장을 일으키는 일이 잦은 것으로 드러났다. 제주도 동부지방 등 태풍 등의 기압골이 이동하는 주통로나 강원도 북부 등 집중호우 빈발지역이 사각지역으로 방치돼 있었다. 특히 기획예산처는 레이더 교체와 신설을 위한 예산편성을 요구받고도 검토하지 않았다.
댐은 설계 기준인 가능최대강수량(PMP)이 기상이변 등으로 크게 높아졌는데도 수자원공사가 관리하는 댐 25개 중 21개가 2006년에나 PMP 안정성 공사를 계획하고 있으며, 한강 수계의 수력발전용 댐들은 홍수기에 홍수 조절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지적사항들의 개선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공무원과 시민들의 안전의식이다. 태풍 ‘매미’ 앞에서도 안전의식의 유무에 따라 그 피해상은 판이하게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