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쿤 WTO 각료회의 합의 실패로 돌아본 한국 농업 문제…
한국농업은 변화하고 있다, 시간만 있다면
야심적 목표를 가지고 시작됐던 세계무역기구(WTO) 제5차 각료회의는 결국 최종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끝났다. 그러나 이번 협상은 세계무역협상에 새로운 이정표로 기억될 것 같다.
지난번 우루과이라운드(이하 UR)에서는 미국과 유럽연합(EU)이 비밀협상을 통해 합의안을 도출한 뒤 두 거인이 협상을 주도하고 나머지 국가들이 따라가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번에도 회의 개시 직전 미국과 유럽연합이 전격적으로 합의안을 발표하고, 이를 기초로 의장 초안이 마련되어 다시금 양대 세력의 주도로 합의가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개도국 그룹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결국 합의에 실패함으로써 앞으로 세계무역질서 논의가 미국, 유럽연합 그리고 개도국 그룹의 삼극체제로 진행될 것임을 예고했다.
시장개방과 농민의 생존
각료회의의 결렬은 우리 농업에 두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하나는 관세나 보조금 감축의 구체적인 방식, 곧 세부원칙(modalities)이 제시되지 않은 채 다음해에 쌀 협상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쌀 협상은 아무런 지침이 없는 상황에서 주요 무역상대국과의 양자협상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무역상대국이나 우리나 양자 모두 얼마나 요구하고 내주어야 할지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합의를 도출해야 하므로 더욱더 치밀한 준비와 결단이 필요하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이번 합의에는 실패했지만 각료회의가 세계무역기구 일반 이사회와 사무국이 긴밀히 협조해 올해 12월15일 안에 고위급 일반이사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고, 애초 기한 안에 성공적인 타결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도록 위임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농업협상이 세계무역기구 일반이사회 산하의 농업위원회에 다시 부쳐져 논의될 것이므로 협상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함은 물론 국내 대책 수립에 조금도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칸쿤회의는 끝났지만 시장개방의 시계는 지금도 째깍째깍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시간을 활용하여 정부는 개도국 지위 유지에 더욱 노력하고, 급격한 농산물 가격하락으로 인한 농가경제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새로운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일을 서둘러야 한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국민적 이해와 협력 없이는 이루어지기 어려운데 이에 대한 비농업계의 반응은 매우 싸늘하다. 그리고 이것이 농민들을 더욱 막다른 심정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경해씨의 자결로 상징되는, 농민들의 호소는 무엇인가.
산업화가 시작된 이래 계속 오르기만 하던 농산물 가격이 1990년대 중반부터 떨어지기 시작해 우리나라 농가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경영규모 0.5ha 이하의 영세농가는 놀랍게도 이 기간에 소득이 명목으로 14%나 감소했다. 또 규모를 확대하거나 시설투자를 많이 한 농가는 부채 부담에 쩔쩔매고 있다. 그런데 앞으로 시장개방이 더 빨라진다니 농산물 가격이 얼마나 더 떨어질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이렇게 불안한 상황에서는 시장개방이 시대적 대세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일단 결사적으로 반대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농민들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그러나 농산물 협상을 농민들만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로 이해해서는 결코 안 된다. 협상 결과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애초 협상 초안대로 우리나라가 선진국 조건으로 농산물시장을 개방한다면 농업부문 총소득이 15조원에서 9조원 수준으로 감소할 가능성이 크다. 그때 농업취업자가 현재 수준의 소득을 유지하려면 자연감소와 전직을 고려하더라도 기존 농업취업자 중 최소한 25만~50만명이 일자리를 잃는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실업자가 70만여명임을 생각하면 상황이 매우 심각함을 알 수 있다.
한국 농업은 이미
몰라보게 바뀌었다
이들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것도 어렵지만, 농민 대부분이 50대를 넘었으므로 도시로 나가 새로운 일자리를 갖기에도 너무 늦다. 만약 복지정책으로 이 문제를 풀려면 연간 수조원이 소요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농산물 시장개방은 단순히 농민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국민경제 문제이며 납세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UR 이후 1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개방준비를 갖추지 못한 것을 도덕적 해이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그러나 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체제 시절 반세기 가까이 농산물은 무역자유화 논의에서 예외로 취급되었고, UR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도 이른바 선진국들이 관세와 보조금의 ‘철폐’를 포기하고 2010년까지 ‘점진적’ 감축 폭을 논의하는 데 머물 수밖에 없었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왜 미국, 유럽연합 모두 오랫동안 중요 품목에 대한 가격 및 목표소득지지제도를 운용해왔고, 이번 협상에서 개도국들의 아우성을 뿌리치고 이 제도를 유지하는 데 필사적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새겨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농업생산이 감소하면 그만큼 농업취업자가 줄어야 하는데 어느 나라에서나 농업취업자가 단기간에 대량 감소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또 농업구조조정은 세대교체 과정을 거쳐 서서히 진행될 수밖에 없음을 모든 나라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100년 이상 전부터 산업화가 진행되어 여러 차례의 세대교체 과정을 거쳐 농업구조조정을 이뤄온 나라들조차 농업생산의 급격한 위축을 감당하는 것이 어렵다면, 산업화가 시작된 지 이제 40년밖에 안 된 한국 농업이 첫 번째 세대교체 과정을 기다리기 위해서는 선진국보다 긴 조정기간이 필요하다. 선진국들이 오랫동안 사용해왔고 앞으로도 사용할 목표소득지지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무리한 주장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UR 이후 10년간 한국 농업은 재정만 낭비하고 변화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러한 인식이 농업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안을 들여다보면 이미 많이 바뀌고 급격하게 변화하였다. 그동안 농업투융자가 늘어나 10년 전에 비해 농산물 생산과 유통 과정이 몰라보게 기계화·시설화됐다. 이런 자본형성 덕분에 1980년대 후반에는 농업부문 성장률이 연평균 마이너스 0.9%를 나타냈으나 90년대 후반에는 연평균 3.6%로 높아졌다.
이와 같은 농업성장에 힘입어 농산물 공급은 풍부하고 다양해졌으며, 농산물 가격은 8% 하락했다. 이같은 가격하락으로 농산물의 국내외 가격차가 축소되는 계기가 마련됐고, 농산물 공급이 싸고 풍부해진 만큼 소비자는 좋아졌다. 그런데 농가 호당 농업소득은 감소하고 부채상환이 어려운 농가가 속출하는 ‘뜻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는 뜻하지 않은 결과가 아니다. 경쟁력 향상이란 국내가격의 하락으로 실현되고, 그 결과 농가의 생산규모가 늘어나지 않는 한, 소득이 줄어든다는 것은 이미 ‘예정된 결과’임을 대부분 잊고 있었을 뿐이다.
변화를 좀더 진지하게 생각하자
농업이 영세농 구조에서 전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경쟁력 있는 농가로 생산이 집중되는 구조조정도 놀랄 만큼 진행되고 있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경작규모 3ha 이상인 대농의 수는 6%밖에 안 되지만 총경지의 26%를 차지하고 있다. 10년 전에는 10%였으니 생산집중이 3배 가까이 늘어났다. 쌀의 경우 경작규모 2ha 이상인 농가 8%가 총면적의 32%를 차지한다. 시설채소 농가는 2천평 이상 경영하는 상층농가 10%가 전체 생산의 47%를 생산하고 있으며, 한우도 20마리 이상 키우는 농가 6%가 총생산의 50%를 차지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농가경제 현실과 농민의 심정, 그리고 농업변화에 대한 객관적 사실, 선진국 경험이 말해주는 농업 문제의 숙명에 대해 모두가 선입견을 버리고 깊이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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