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봄입니다. 봄은 언제나 이렇게 우리 곁으로 슬며시 다가오나 봅니다. 알고 계셨나요? 벌써 새봄 가운데 있는 것을 말입니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과 우수가 이미 지났고 대동강 물이 녹아 완연한 봄임을 알린다는 경칩이 3월 5일입니다. 예배당 가는 길가에 벌써 벚꽃이 활짝 피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벌써 몇 주 전 파란 새싹을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아직 겨울옷을 입고 지낸다고 그동안 봄을 잊고 살았던 가요? 이런 저런 핑계로 걸어보지 못한 산책길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보랏빛 하늘하늘한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그 곁을 노란 꽃들이 수놓듯 피어 있습니다.
창밖이 눈부십니다. 겨우내 보지 못했던 햇살입니다. 봄볕을 즐겨봅니다. 영국이 자랑하는 화가 윌리엄 터너의 이야기였던가요? 태양 빛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오랜 동안 스스로 빛이 차단된 캄캄한 창고에 박혀 있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후기 인상파 화가들이 태양 빛을 왜 그토록 강렬하고 거친 붓놀림으로 표현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두운 겨울 창고에 갇혀 있었던 태양이 눈부시게 빛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푸릇푸릇한 가지에 앉은 꽃들이 따사로운 봄볕을 쬐고 있습니다. 심술 맞은 꽃샘바람을 이겨내고 피어난 꽃들이기에 더 사랑스럽게 느껴집니다. 다가오는 봄을 무엇인들, 그 누구인들 막을 수 있을까요! 봄은 찬란합니다.
윔블던 힐을 향해 언덕을 오릅니다. 언덕길을 오르다말고 잠시 뒤돌아서서 내려다봅니다. 저 멀리 석양에 서서히 물들어가는 도시의 지평선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자동차로 달려 내려올 때 느끼던 멋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자주 산책하는 길을 따라 걷습니다. 작고 아담한 집들이 있는 길을 올라가 길을 하나 더 건너면, 멋진 큰 집들이 줄지어 있는 길이 나오고, 그 길을 지나면 넓은 풀밭이 나옵니다.
윔블던 커먼(Wimbledon Common)은 막 자란 풀들이 널려있는 공유지인데 풀밭 가에 집들이 빙 둘러있고 말이 다니는 길과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 따로 있는 그런 곳입니다. 자주 찾는 산책객의 눈에는 처음 보는 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풍경이 잡힙니다. 풀밭 한가운데 물이 고인 못을 그냥 세숫대야라고 불렀었는데 러시미어(Rushmere)라는 당당한 이름을 가진 것을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물가를 빙 둘러 집들과 나무로 멀리 동그랗게 둘러싸여 있는 풍경은 평범하지만 보면 볼수록 사랑스럽습니다. 이곳 풍경을 바라보는 봄의 맛은 가을의 그것과 확연히 다릅니다. 이러다가 나도 저기에 벤치 하나를 더 짓고 그 위에 이름을 새기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윔블던의 봄을 누구 못지않게 즐기고 사랑했던 제임스 킴을 기념하며…….”
나는 윔블던이 좋습니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윔불동(洞)이 좋습니다. 너무 화려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은 윔블던 역사(驛舍)가 좋고 일상생활에 불편함을 모르게 하는 하이스트리트가 좋습니다. 예배 마친 후 차 한 잔 마시러 들르는 길모퉁이 손님 가득한 스타벅스와 편안한 그 옆집이 좋고 무뚝뚝하게 맞아주지만 샌드위치 맛있게 만드는 오래된 브렉퍼스트 카페가 좋습니다. 자그마한 라운드 어바우트(round about)도 사랑스럽습니다. 그 곁에 둥지를 튼 행복한 교회가 있어서 더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온 새싹을 보았습니다. 이 길은 작년에 새로 아스팔트로 포장한 길인데 어떻게 뚫고 올라왔을까요?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새롭게 솟아납니다. 차가운 겨울을 이기고 따뜻한 봄이 찾아왔습니다. 봄은 생명입니다. 따스한 햇볕을 맞으며 창가에 앉아 행복한 봄을 즐겨봅니다. 조그마한 새싹에 숨은 생명이 자라나 꽃 피우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꿈을 꿉니다. 한 가지가 푸르러지고 생기가 넘쳐 담장너머로 뻗어나가는 꿈입니다. 세계와 열방으로 뻗어 나간 생명의 가지에 풍성한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는 꿈을 꿉니다.
구약성경 이사야서를 처음부터 읽어 보셨나요? 이사야서는 음울한 겨울 분위기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전반부는 그야말로 겨울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의 어둡고 반복적인 범죄와 그에 관한 하나님의 얼음같이 차가운 엄중한 심판의 메시지가 살을 에는 겨울바람처럼 느껴집니다. 39장까지 그런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40장부터 봄 햇살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햇살은 점점 더 환하게 비치고 있습니다.
영어성경을 펼쳐서 읽어 봅니다. 이 부분의 분위기가 더욱 실감나게 느껴집니다. 이사야서의 많은 부분이 운문으로 기록된 것도 알게 됩니다. 운문으로 시작되었던 책에 산문이 드문드문 섞여 나오다가 36장을 넘어서면 산문체로 바뀝니다. 40장부터 다시 운문체로 바뀌는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형식뿐 아니라 내용도 완전히 바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서 후반부는 캄캄한 밤이 지나고 먼동이 터오는 아침처럼 새로운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0장을 넘어 서면, 심판이 아니라 평안, 절망이 아니라 희망과 위로의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43장에는 봄 햇살처럼 환히 비쳐주시는 찬란한 은총의 말씀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사계절 중에 유독 봄에만 “새”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에 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아무도 새 여름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을과 겨울을 좋아해도 새라는 수식어는 붙일 수 없습니다. 새 가을? 새 겨울?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왜 봄에만 유독 새 봄이라는 수식어가 붙을까요? 나름대로 답을 해 봅니다. 기다림 때문입니다. 겨울을 지내는 동안 사람들은 봄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봄은 그야말로 새 봄입니다. 봄은 언제나 새 봄입니다. 왜냐하면 겨울이 너무나 길고 어둡고 지루했기 때문입니다. 오래토록 봄을 기다려왔기 때문입니다.
봄은 마음으로부터 옵니다. 이제는 봄기운이 마음으로부터 솟아올라 환한 미소와 솟아오르는 기쁨으로 피어나야 할 새 봄입니다.
봄은 어디서 올까?
봄은
달력에서 오는 줄 알았지
입춘 지나고
우수 경칩 오면
봄
봄은
날씨에서 오는 줄 알았지
때 아닌 진눈깨비
꽃샘바람 심하게 불어도
봄은 봄
봄은
꽃과 나무에서 오는 줄 알았지
나뭇가지 새싹 더디 돋아도
찬바람에 꽃잎 곱지 않아도
봄
봄이
마음에서 오는 줄 몰랐지
겨울 외투 입고 있어도
눈보라 세차게 불어도 내 마음은
새 봄
김석천 목사
행복한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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