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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간해서 보기 힘든 것이 아버지의 눈물이다.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아버지는 가정을 지키는 수호신이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삶의 공급자이기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쉽게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는 정서가 깊이 배여 있기 때문이다.
작가 윤문원 씨가 쓴 수필 <아버지 술잔에는 눈물이 절반이다>중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아버지란 때로는 울고 싶지만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이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어머니의 눈물은 얼굴로 흐르지만 아버지의 눈물은 가슴으로 흘러 가슴에 눈물이 고여 있다. 아버지의 울음은 그 농도가 어머니 울음의 열 배쯤 될 것이다.”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이 글에 공감할 것이다. 아버지란 겉으로는 태연해 하거나 자신만만해 하지만 속으로는 인생의 허무감과 가족에 대한 걱정으로 외로움과 괴로움을 겪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결코 항상 강한 사람일 수 없고 때로는 너무 약하고 쉽게 무너지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들도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주로 혼자서 운다고들 한다. 아무도 모르게… 부인도 모르게… 자녀들도 모르게….
그런데 아버지가 큰 소리를 내며 울 때가 있다. 주로 자신의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와 자녀가 죽을 때라고 한다. 특히 사랑하는 자식이 자신보다 먼저 죽는 것을 보게 될 때 아버지는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참혹한 슬픔을 경험하며 통곡을 하게 된다.
아버지 다윗의 눈물
성경에도 자식의 죽음 때문에 대성통곡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등장한다.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위대한 왕으로 칭송되는 다윗(David)이 자신의 아들 압살롬(Absalom)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소리를 내며 우는 모습이 나타난다(삼하19:1,4).
그런데 아버지 다윗은 왜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대성통곡을 했던 것일까?
나는 다윗의 아들로 인한 절규와 눈물을 고찰할 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현대의 아버지들이 함께 생각하며 고민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믿는다.
(1)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눈물
압살롬은 다윗의 사랑을 받던 셋째 아들이었다. 그는 아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자주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삼하13:25-27). 심지어 압살롬이 살인을 하고 자신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반역을 했던 와중에도 아들에 대한 마음은 간절했다(삼하13:38-39; 14:33). 심지어 궁에 남아 있던 후궁들을 범하고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오던 긴박한 순간에도 다윗은 호위 장수들에게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고 말할 정도로 아들 압살롬의 안전을 염려했다(삼하18:5). 하지만 아버지의 이러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은 나무가지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다가 다윗의 부하들에게 잡혀서 창에 찔려 죽는다(삼하18:9-15). 그를 죽인 다윗의 부하들은 이제 골치덩이 아들이 없어졌으니 다윗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왕에게 달려갔지만 다윗은 전혀 기뻐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통곡을 하며 소리를 지르게 된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면서 애통의 눈물을 흘렸다(삼하18:32-33).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윗은 자식 때문에 눈물을 흘린 아버지요, 자식을 위해 눈물을 흘린 아버지였다는 사실이다. 자식이 온갖 못 된 짓을 할 때에도 그를 사랑했던 아버지였고, 그러한 아들의 죽음 때문에 눈물을 흘린 아버지였다. 그렇다면 자식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현대의 아버지들에게 다윗의 눈물은 큰 도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나는 아버지로서 자식에 대한 사랑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가?
다윗은 자식의 죽음으로 인하여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와중에,
하나님께 간절한 눈물의 기도를 드렸던 아버지였다.
그렇다면 그가 쏟은 눈물은 자식에 대한 사랑의 눈물이요,
자녀 교육에 대한 회한의 눈물인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께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보며
도우심을 구했던 회개와 간구의 눈물이 된다.
(2) 자녀 양육의 실패로 인한 회한의 눈물
눈물의 배후에는 슬픔과 더불어 후회도 있는 법이다. 다윗이 단순히 자식을 잃어서 슬퍼서 울었다고만 생각해서 안 된다. 위의 원문은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어야 했다”며 다윗의 눈물의 배후에 자신의 인생에 대한 깊은 후회와 탄식이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필경 다윗은 아들의 죽음 앞에서 나단 선지자가 간음한 자신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꾸짖던 소리를 떠올렸을 것이다 (삼하12: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래서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죄로 인하여 자식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을 떠올리며 더욱 심하게 오열하고 통곡했을 것이다.
특별히 다윗은 자녀교육을 등한히 한 아버지였다. 그는 장남 암논이 정욕에 눈이 멀어 배다른 누이를 강간하고 버렸을 때에도, 셋째 아들 압살롬이 그 암논을 죽이려고 계략을 꾸미고 실행할 때에도, 심지어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준비할 때도 전혀 분별력이 없었고 그러한 자식들의 행동을 바로잡지 않았다. 화만 냈지 대책을 세우지 못한 아버지였다. 믿음은 컸지만 자녀교육에는 철저하게 실패한 아버지였다.
그렇다면 현대의 아버지들은 어떠할까? 자녀교육을 등한히 한 채 회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버지들이 있다면 다윗의 눈물을 더욱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3) 하나님 아버지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눈물
다윗이 눈물을 흘릴 때 옆에서 함께 울어 줄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꽤 큰 충격이었다. 충신인줄 알았던 요압 장군마저 다윗의 눈물을 부끄럽게 여기고 당장 눈물을 거두지 않으면 다 떠나겠다고 겁박을 했으니(삼하19:5-7) 그 때 다윗의 마음은 얼마나 참담하고 슬펐을까? 시편 38편을 보면 당시의 다윗의 마음을 엿보게 하는 구절들이 나온다.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11),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17-18),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21-22).
그렇다. 다윗은 자식의 죽음으로 인하여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와중에, 하나님께 간절한 눈물의 기도를 드렸던 아버지였다. 그렇다면 그가 쏟은 눈물은 자식에 대한 사랑의 눈물이요, 자녀 교육에 대한 회한의 눈물인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께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보며 도우심을 구했던 회개와 간구의 눈물이 된다.
오는 6월 16일은 ‘아버지의 날’(Father’s Day)이다. 영국에 있는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기리고 감사하는 예배를 드린다. ‘어머니의 날’과 같은 열기는 아직 미흡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고 존경과 감사를 표하는 날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날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어떤 선물이 아버지의 눈물을 씻어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아버지가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을 고민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그 주간만큼은….
박금일 목사
원네이션 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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