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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과 월리스 적이었나 동지였나
코리안위클리  2013/09/18, 07:37:39   
▲ 다윈과 함께 진화론의 공동 창시자로 평가받는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 지난 1월 런던 자연사박물관에 헌정된 초상화다.

잊혀진 진화론의 공동창시자 월리스 사후 100년

세상은 언제나 일등만 기억한다. 1969년 7월 21일 닐 암스트롱이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디뎠다. 정확하게 19분 후 에드윈 버즈 올드린이 두 번째로 달에 내렸으나 아무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올드린은 확실한 2등을 했으니 그렇다 쳐도, 동반 1등을 했는데도 한 사람만 기억하고 또 한 사람은 완전히 잊어버린 억울한 사연도 있다. 진화론을 주창한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1823~1913) 이야기이다.

‘아니 진화론이라니? 찰스 다윈(1809~ 1882)이 아니고?’라는 분이 많을 것 같다. 지구상 생명의 신비의 비밀을 최초로 풀었다고 해서 근대과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학설이라는 진화론이 학계에 처음 발표될 때 논문의 작성자는 다윈 혼자만이 아니었다. 정확히 얘기하면 1858년 7월 1일 ‘진화론 소론(小論)’이 두 사람 공동 명의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생물·자연박물학회인 ‘런던 린네협회’에서 공식 발표되었다. 그런데도 세상은 진화론 하면 찰스 다윈의 이름만 기억하지 월리스를 떠올리지 않는다. 오죽 했으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놀라운 사실을 찾아 방영해 주는 MBC TV 프로그램 ‘서프라이즈’에서 ‘다윈 혼자서 진화론을 주창한 것이 아니다’라는, 조금만 조사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을 대단한 것처럼 방영했을까?
 
다윈은 1858년 6월 18일 인도네시아 테르나트섬에서 월리스가 3월 9일에 발송한 편지를 받는다. 편지에는 다윈이 읽다가 거의 의자에서 떨어질 뻔할 정도로 놀라운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지난 20년간 자신이 연구해 오던 진화론의 이론이 고스란히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다윈이 진화론 연구를 한다는 사실은 그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물론 비밀은 아니었다. 그래도 자세한 이론은 가까운 친구들에게나 보여줬을 뿐 아직 제대로 체계화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1만6000㎞ 떨어진 외딴섬에 있는 무명의 젊은이가 자신과 거의 같은 내용의 이론을 적어 보냈으니 방심하고 있던 다윈으로서는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다윈은 월리스의 편지를 즉시 친구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과 식물학자 조셉 후커에게 보내면서 뒷수습을 부탁했다. 자신은 자식의 병구완을 하러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 편지에서 다윈은 ‘나는 이런 우연의 일치를 정말 난생처음 보네!’라고 쓰면서 ‘이 친구는 정말 간단명료하게 잘 정리했어. 내 논문 서문으로 사용해도 될 정도일세. 비록 그가 발표를 원한 것은 아니지만 학술지에 보내 보라는 권유의 편지를 쓸 생각이네!’라고 했다. 편지를 받은 다윈의 두 친구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는다. 자신들의 친구가 오랫 동안 연구한 결과가 순식간에 수포로 돌아갈 지경임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만했다. 둘은 주저하지 않고 바로 학회에 두 사람 공동 명의로 진화론 논문을 발표하기로 결정한다. 물론 다윈의 ‘발견 우선권(scientific priority)’을 전제로 해서 말이다. 다윈이 편지를 받은 지 단 2주 뒤에 짧은 논문이 런던의 린네협회에서 발표되었다. 이때 다윈의 논문에는 1847년 후커에게 개인적으로 공개한 내용과 1857년 미국 식물학자 아사 그레이에게 보낸 편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윈이 먼저 이론을 만들었다는 증빙이다. 발표장에는 정작 당사자인 다윈도 월리스도 모두 참석하지 않았다. 다윈은 아들 병구완을 하느라 돌아올 수가 없었고 워낙 급하게 발표를 준비하느라 먼 거리에 있는 월리스에게는 연락을 할 엄두도 못냈다.

▲ 월리스와 다윈의 공동 명의로 <진화론 소론>이 발표됐던 런던 린네협회 파인룸. 지금은 카페로 쓰이고 있다.

▲ 월리스와 다윈의 공동 명의로 <진화론 소론>이 발표됐던 런던 린네협회 파인룸. 지금은 카페로 쓰이고 있다.

 
월리스는 다윈에게 발표를 부탁하지도 않았으니 자신의 편지가 학회에 보고된다는 사실조차도 물론 몰랐다. 당시는 이런 일은 큰 문제가 되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해서 월리스의 편지는 발표되었다. 제대로 된 정규교육도 못 받고 곤충채집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무명의 월리스는 당대 최고의 학자 다윈과 함께 현대과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진화론의 공동 주창자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 15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다윈이 계속 음모설에 휘말리고 있다는 점이다. 다윈이 월리스의 이론을 낚아채서 진화론의 공동 주창자로 끼어들었고, 그래서 월리스는 억울하게 다윈의 그늘에 묻혀 버렸다는 얘기이다. 정황으로 봐서 세상이 좋아할 그런 음모설이 생겨날 조건들이 많기는 하다. 그래서 다윈과 월리스와 진화론은 ‘불편한 진실’의 단골메뉴이기도 하다.

아직도 영국에서는 다윈이 ‘종의 기원’이란 책을 먼저 쓰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진화론 이론을 종이에 정리해서 처음으로 쓴 사람은 월리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영국 자연사박물관 큐레이터 조디 베카로니 박사도 그중 하나다. 또한 인도네시아를 여행하다 우연히 월리스를 재발견하고 월리스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월리스 재평가 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는 영국의 유명 코미디언 겸 가수 빌 베일리도 있다. 베일리는 “그는 분명 도둑을 맞은 겁니다. 어떻게 상황을 돌려 보아도…”라고 진화론 이야기만 나오면 흥분을 한다.

이렇게 누가 먼저 진화론을 주창했느냐는 논쟁은 오는 11월 월리스 사망 100년을 맞아 다시 달아오르고 있다. 지난 1월 영국 자연사박물관에 월리스의 대형 초상화가 빌 베일리에 의해 헌정된 것을 시작으로 1년에 걸친 행사가 계속되고 있다. 영국 내에 아직 제대로 된 동상도 하나 없어 자연사박물관과 함께 빌 베일리가 동상 건립 모금 운동에 열중하고 있다. 이 둘을 중심으로 월리스 편지의 수집과 온라인화도 진행 중이다. 월리스의 편지는 무려 4500편에 이른다. 개인적이거나 학술적인 편지들이다. 2년에 걸쳐 세계 100여개 기관에 흩어져 있던 편지를 찾아내 모아서 그중 95%를 디지털화했다. 헌신적인 한두 사람의 힘이 역사 속에 묻힌 영웅을 다시 살려 내고 있음이 놀랍다.

▲ 지구상 생명의 신비의 비밀을 최초로 풀었다고 해서 근대과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학설로 인정받는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과 1859년 발표된 종의 기원.

▲ 지구상 생명의 신비의 비밀을 최초로 풀었다고 해서 근대과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학설로 인정받는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과 1859년 발표된 종의 기원.

 
열세 살에 가세가 기울어 학교를 중단한 후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고 남미 아마존과 동남아 정글을 헤매고 다니면서 동식물을 채집해 생계를 유지하던 월리스와 달리 다윈은 출발부터가 달랐다. 다윈은 영국의 전형적인 부유한 중상층 집안 출신이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모두 물리학자, 자연철학자, 의사였다. 비록 마치지는 못했으나 가업을 잇기 위해 당시 최고의 의과대학 에든버러대학을 다니다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칠 정도의 엘리트였다. 외할아버지는 지금도 생산되고 있는 세계 최고의 영국 본차이나 제작자 조사이어 웨지우드였으니, 월리스와는 신분이 도저히 비교될 수 없었다. 신분으로 보나 영향력으로 보나 다윈이 월리스를 누르고 올라섰을 만한 개연성이 충분히 있었다. 더군다나 힘센 다윈은 진화론의 아버지가 되었고 약한 월리스는 세인들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으니 사람들이 다윈 측의 음모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은 당연하다.

월리스의 진화론에 대한 우선권을 주장하고 다윈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다윈이 월리스로부터 편지 받은 날짜를 속이고 2주간을 손에 쥐고 고민했고 급기야는 월리스 편지 내용의 일부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까지 비난하고 있다. 이런 음모론에 대한 책은 그동안 많이 나왔다. 그중에는 영국 BBC 기자 로이 데이비스, 미국 언론인 아놀드 브레크만, 미국 인류학자 로렌 아이슬리 등의 책이 유명하다. 실제 다윈 생존 시절에도 이런 비난은 엄청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다윈은 ‘종의 기원’ 3판부터 자기 이전에 진화론 비슷한 이론을 거론한 과학자들의 이름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최종판에는 무려 34명의 학자들 이름이 나온다. 그래도 비평가들은 이름만 간단하게 기록할 뿐 어떤 내용인지에 대한 각주 정도의 언급도 없다고 빈정댄다.

다윈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한 사람들의 연구도 그에 못지않다. 예를 들면 미국 피츠버그대학 과학 철학 역사학자 제임스 레녹스는 진화론의 기초적인 아이디어는 다윈의 1838년 노트에서 발견할 수 있고 ‘종의 기원’의 전반적인 초고는 월리스로부터 편지를 받기 12년 전인 1844년에 이미 다 완성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1858년 공동발표 소론을 면밀하게 검토해 본 학자들은 두 논문이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있음에 상당히 놀란다. 뿐만 아니라 미국 미네소타대학 유전학과 교수 말콤 제이 코틀러에 의하면 월리스가 진화론에 대해 첫 실마리를 잡은 계기는 1842년에 발표된 다윈의 비글호 탐사보고서를 읽으면서였다는 것이다. 다윈의 그 글은 월리스로 하여금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Essay on Population)’을 1838년에 읽게 만들었고, 인구론은 결국 월리스 자신에게 20년 뒤 진화론의 영감을 주게 되었다고 월리스 스스로 고백했음을 지적했다. 말레이군도에서 곤충 채집을 해오던 월리스는 1858년 2월 말라리아에 걸려 병석에 누워서 ‘인구론’의 주요 논리를 생각하던 중 문득 ‘변형과 적자생존(variation and the survival of the fittest)’에 대한 ‘유레카(Eureka)’적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다윈의 ‘진화(evolution)’와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라는 단어는 안 썼지만 이 영감으로부터 월리스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재빠르게 진화하는 종이 생존할 가능성이 많아져 신종의 기원으로 이어진다’라는 나름대로의 진화 이론의 체계를 잡는다. 그리고는 3일 밤을 새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다윈에게 편지로 보낸다.

2011년 연구가들의 치밀한 조사에 의해 월리스의 편지가 77일간 어떻게 다윈에게 배달됐는지도 상세하게 밝혀졌다. 조사에 의하면 월리스의 편지는 4월 5일 이전에는 인도네시아 항구를 벗어나지 못했다. 월리스의 편지가 자카르타, 싱가포르, 스리랑카, 수에즈, 알렉산드리아를 거치고 급기야는 이틀 동안 낙타 등에 실려 이집트 사막을 건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편지가 6월 18일 이전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중요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다윈이 월리스의 편지를 받고 친구 라이엘에게 편지를 쓸 때까지 2주 동안 편지를 부여잡고 고민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정도만 해도 다윈의 선의는 충분히 해명될 만도 하다. 실제 다윈도 처음 월리스의 편지를 받고 자신의 저서 서문으로 써도 되겠다고 극찬을 하면서 바로 학술지에 보내서 게재되도록 월리스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할 정도로 신사였다. 하지만 친구들이 말리고 바로 공동 발표를 하게 만들었다. 사실 공동 발표로 다윈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이미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윈이 진화론을 연구하고 있음은 비밀이 아니었고 그는 그 발표로 인해 더 얻어질 학문적 명성도 없었다. 거기다가 공동 발표자는 정말 거의 무명의 상업적인 수집가였으니 말이다. 차라리 누가 되었으면 되었지 도움은 되지 않을 형편이었다. 다윈을 변호하는 사람들은 다윈이 그 편지 자체를 무시하거나 없애 버리고 자신의 소론을 발표하거나 아니면 그대로 ‘종의 기원’을 계속 써서 출판했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까지 한다. 당시의 우편 서비스는 지금 같지 않았고 편지를 받으면 서명하는 제도도 없었다. 특히 먼거리 오지에서 오는 편지는 제대로 전달되는 경우보다는 없어지는 경우가 더 많았을 정도였다. 받고도 안 받았다 해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다윈이 편지를 받고 굳이 회답을 해야 할 의무도 없었고 월리스도 회답을 추궁할 입장도 아니었다. 다윈의 선의의 신사적 행동이 다윈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사실 1858년 7월 1일의 공동 발표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오로지 다음해의 ‘종의 기원’ 출판만이 폭풍 같은 사태를 몰고 왔다. 초판 1250부는 첫날 매진이 되었다. 심지어는 무디스라는 회원제 도서관에서 500권을 매점할 정도였다. 한 달여 만인 그 다음해 1월에 2쇄 3000부를 찍었는데도 주문을 다 소화하지 못했다. 그후 10년간 거의 2만부 이상이 팔렸다. 지금 기준으로 따지면 200만권에 해당하는 수치다. 이렇게 해서 ‘종의 기원’은 진화론의 바이블이 됐고 다윈은 국제적 인물이 되었다.

월리스가 세인들에게 잊혀진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월리스는 생전에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항상 다윈을 먼저 내세웠고 자신이 앞장서서 다윈을 선전했다. 급기야는 1889년 ‘다위니즘’이라는 책까지 내면서 다윈을 진화론의 유일한 아버지로 만들었다. 월리스가 잊혀진 또 하나의 이유는 창조론에 대한 반발로 진화론이 인기를 반짝 끌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정향진화(orthogenesis), 돌연변이(mutation) 같은 새로운 학설들이 잇따라 등장하면서 진화론 자체가 세인들에게서 잊혀져 갔기 때문이다. 20세기 들어와 유전학에 의해 진화론이 다시 해석되기 시작하면서 살아났지만 이미 월리스는 다윈의 ‘종의 기원’의 그늘에 가려져 진화론의 영광에서는 완전히 사라지고 만 뒤였다.

월리스는 생전에 다윈에 대해 전혀 유감이 없었고 공·사석을 비롯해 한번도 다윈에 대해 나쁜 말을 한 적이 없다, 다윈이 자신보다 먼저 진화론은 만들었고 단지 발표를 안 했을 뿐이라는 점을 늘 인정했다. 다윈과의 공동 발표가 아니었다면 도저히 자신의 것만으로는 학계로부터 진지한 인정을 받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비록 자신의 허락을 받지 않은 공동 발표라 해도 자신의 이름이 포함된 것만도 영광이라고 여겼다. 사람들은 월리스에게 소론을 왜 직접 학술잡지사로 안 보내고 다윈에게 보냈느냐고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정작 월리스 본인은 ‘나 같은 학력도 없는 일개 곤충 수집가의 논문을 누가 제대로 봐 주기나 했을까요? 어설프게 쓰여진 추론 정도로나 보지 않았을까요? 저는 다윈의 공동 발표자로서 만족합니다”라고 했다. 또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나중에 내가 어떻게 영국 사회에서 그렇게 활동할 수 있었겠느냐”고 되묻기까지 했다. 다윈이 진화론에 대해 더 많은 인정을 받음은 당연하다는 변호였다. 심지어는 다윈과 자신이 비교되는 것마저 영광이라고 했다. 만일 다윈을 폄하하는 말을 듣는다면 지금이라도 무덤에서 당장 뛰어나와 열변을 토할 것이 틀림없을 정도의 대단한 다윈론자가 월리스였다.

▲ 런던 자연사박물관의 다윈 석상.

▲ 런던 자연사박물관의 다윈 석상.

 
다윈과 월리스의 관계는 둘 다 인정하듯이 끝까지 상당히 좋았다. 아버지 재산을 전혀 물려받지 못한 월리스는 평생 정기적인 수입이 없어 고통을 받았다. 자신의 수집품을 판 수입과 학술지 고료와 책 인세를 통해 살아갈 수밖에 없어 경제적인 곤경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1881년에 가서야 다윈과 라이엘의 지대한 노력 덕분에 과학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명분으로 정부로부터 어렵게 연 200파운드의 연금을 받게 되었다. 당시의 200파운드라면 현재의 약 1만파운드(1800만원)에 해당하는 돈이다. 아주 많은 금액은 아니나 기본적인 생활의 어려움은 없을 만큼의 돈이다. 저술 수입과 보태면 더 이상 큰 문제 없이 살아갈 만큼의 수입은 보장된 셈이다.

이렇게 다윈은 끝까지 월리스를 보살피려 했고 월리스 자신도 세간의 어떤 이간질에도 불구하고 다윈 변호에 열을 올렸다. 그래서 다윈은 학벌이나 집안, 경제력, 명성 모두 자신에 비해 형편없이 떨어지는 월리스를 진정한 동반자나 친구로 끝까지 생각했다. 다윈은 자서전에서 월리스의 진화론과 관련한 처신이 얼마나 너그럽고 고상했었는지 모르겠다고 기술하기도 했다. 다윈은 그렇다 쳐도 월리스의 맹목적인 다윈 존경에 대해서는 이해가 좀 어렵다. 그러나 동식물 채집을 통해 돈을 벌어 먹고사는 자신에 비해 명예로운 취미로 과학적 업적에 매진하는 다윈을 월리스가 진심으로 존경했다고 본다면 이해가 갈 만하긴 하다. 먹고살기 위해 수입에 연연해 학문을 파는 자신에 대한 자기 비하가 다윈에 대한 비상식적인 변호로 발전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속으로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월리스의 성공은 사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놀랄 정도이다. 아무런 정규학력이나 연구 경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독학과 독서만으로 20권의 책과 700여편의 논문을 남겼으니 말이다. 백면서생인 그가 당시 유수의 학자로서도 최고의 영예인 영국 학술회 회원까지 되었다. 이 말은 콧대 높은 학자들 사이에서조차 정식 학자로서 충분히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다. 1868년에는 영국 학술회 메달을 받을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거기다가 왕이 일반 시민에게 주는 최고의 훈장인 ‘메리트 오부 오다’까지 받았으니 귀족의 작위만 못 받았을 뿐이지 더 이상 받을 영광도 없었다.

주간조선

글쓴이 권석하

IM컨설팅 대표. 영남대학교에서 무역학을 전공하고 1980년대 초 무역상사 주재원으로 영국에 건너가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유럽 잡지를 포함한 도서와 미디어 저작권 중개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월간 ‘뚜르드 몽드’ ‘요팅’, 도서출판 학고재 등의 편집위원도 맡았다. 케이트 폭스의 ‘영국인 발견(Watching the English·학고재)’을 번역 출간했다. 영국 국가 공인 관광가이드시험에 합격, 관광가이드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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