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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틀스 멤버. 왼쪽부터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존 레넌, 링고 스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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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0월 5일 데뷔·개봉, 축제의 영국 … 한날 두 전설을 낳았다
영국이 비틀스와 007 제임스 본드 50주년을 맞아 각종 행사로 들썩이고 있다. 영국 대중문화 중에서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하고,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 열기가 식을 줄 모르는 최고의 두 아이템이 데뷔한 날짜가 같은 해, 같은 날이어서 분위기가 더욱 뜨겁다. 비틀스의 첫 싱글 ‘러브 미 두(Love me do)’와 007 제임스 본드 첫 영화 ‘닥터 노(Dr. No)’는 모두 1962년 10월 5일 발표와 개봉을 했다. 우연의 일치이긴 하나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1962년은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고난에서 본격적으로 벗어나 대중문화의 꽃이 활짝 피기 시작한 해다.
지금 영국 곳곳의 서점과 음반가게에는 비틀스와 007 스페셜 코너가 만들어졌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기념품가게뿐만 아니라 일반 영국인들이 가는 슈퍼마켓에도 50주년과 관련된 제품을 모아둔 코너가 생겼다. 진지한 어른 컬렉터들을 위한 깜짝 놀랄 만한 수준부터 아이들 장난감까지 다양하다. 제임스 본드가 항상 차고 나오는 오메가 시계의 50주년 기념 한정판은 무려 700만원이 넘는다. 본드 필름 22개 세트는 다행히 35만원 정도라 본드 팬이라면 욕심내 볼 만한 수준이다.
본드 필름뿐 아니라 비틀스 관련 상품도 더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다. 비틀스의 싱글과 앨범은 디지털로 리마스터돼 개선된 음향으로 새롭게 출시되고 있다. CD는 물론이고 LP판도 첫 출반될 당시 모습으로 나온다. 예를 들면 비틀스의 첫 싱글 ‘Love me do/P.S. I Love You’는 출반 당시의 재킷과 모양을 본떠 비닐에 SP(45rpm) 형식으로 담겨 한정판이 제작·판매되고 있다.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진 비틀스의 ‘스튜디오 앨범’ 12장은 한 세트로 묶여 5만장 한정판으로 나왔다. 이 역시 180g 비닐판으로 제작되어 판매되고 있다. 각 음반에 관한 얘기와 설명이 담긴 252쪽짜리 안내서도 포함돼 있다고 해서 수집가들을 흥분시키고 있다.
‘2세 비틀스’ 결성
이런 상품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비틀스 탄생 50주년과 관련해 각종 헌정밴드(tribute band) 공연이 열리고 있다. 세상에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은 비틀스의 재결성 공연이다. 네 명 중 두 명이 이미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헌정밴드라기에는 오리지널에 가깝고, 그렇다고 오리지널 밴드는 아닌 이상한 밴드 결성이 추진되고 있어 세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비틀스 2세들에 의해 ‘2세 비틀스’ 결성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움직임을 두고 비틀스 노래 ‘Here comes the sun’을 빗대어 ‘Here comes the sons’라고 사람들은 빈정댄다. 존 레넌의 막내아들 숀(36), 폴 매카트니의 아들 제임스(34), 링고 스타의 막내 제이슨(44), 조지 해리슨의 아들 다니(33)가 그 결성 시도의 주역들이다. 사진을 보면 아버지와 아들이 닮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긴 하지만 닮아도 참 많이 닮았다. 특히 존 레넌의 아들 숀은 아버지 존을 대표 상징하는 동그란 안경까지 쓰고 있어 젊은 존 레넌이 다시 살아온 것 같은 착각까지 불러일으킨다.
영국 언론이 스타 축구선수의 부인과 여자친구를 일컬을 때 쓰는 ‘왁스(WAGs·Wife And Girl Friends)’라는 말이 있다. 이와 유사한 신조어로 유명인사의 못난 아들딸을 부르는 ‘사도스(SADOS·Sons And Daughters Of Stars)’도 있다. 언론들은 비틀스 2세들을 ‘사도스’라 일컬으며 놀린다. 이렇게 비틀스 아들들의 시도를 보는 세간의 눈길은 차갑다. 특히 폴 매카트니는 아들 제임스의 음악계 진입을 옆에서 열심히 돕고 있으나 별로 성공적이지 못해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이들 ‘사도스’ 중 나름 성공한 경우는 폴 매카트니의 딸인 디자이너 스텔라 매카트니, 존 레넌의 맏아들인 싱어송라이터 줄리안, 링고 스타의 맏아들로 영국 최고의 밴드 ‘오아시스’와 ‘더 후’의 드러머로 활동 중인 잭 정도다.
조지 해리슨의 11주기를 맞아 2011년에 나온 그의 일대기를 다룬 기록영화도 비틀스 50주년을 즈음해서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출시 당시는 상영 시간이 3시간20분으로 길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데 요즘 새롭게 관심을 받고 있다. 조지 해리슨의 팬들은 비틀스 멤버 중에서 가장 관심을 못 받은 조지 해리슨이 사실은 비틀스 전체에 끼친 영향이 일반이 아는 것보다 상당히 크다고 주장한다. 비틀스 노래 중 ‘Something’ ‘Here Comes the Sun’ 같은 주옥 같은 곡들이 해리슨의 작곡이었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비틀스 음악이 인도 음악에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은 조지 때문이다.(당시 비틀스 멤버들이 따르던 인도 악기 시타 연주의 대가 라비 상카의 딸이 유명한 미국 재즈가수 노라 존스이다.) 같은 맥락으로 보면 링고 스타도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긴 마찬가지다. 링고 스타와 관련해 잘 알려지지 않은 재미있는 사실도 있다. 어린이들의 인기 만화영화 시리즈 ‘토머스 탱크 엔진’에 등장하는 주인공 목소리가 링고 스타의 목소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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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틀스의 ‘에비로드’ 재킷. |
비틀스 멤버들 재산은
비틀스가 얼마나 부자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비틀스 이름이나 판권을 관리하는 회사(Apple Corp Ltd)와 영국 국세청 외에는 재산 규모를 정확히 모른다고 한다. 재산은 계속 불어나고 있다. 저작권 때문이다. 예를 들면 미국 TV드라마가 비틀스의 노래 한 곡을 사용하는 데 25만달러를 지불했다니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들의 노래는 황금알을 낳고 있다. 가히 천문학적이라 할 수 있다. 얼마 전 더 타임스는 비틀스 멤버 각자의 재산(죽은 사람의 부인과 자녀 자산 포함)에 대해 폴 매카트니 5억1500만파운드(9270억원), 존 레넌 2억파운드(3600억원), 조지 해리슨 1억8000만파운드(3240억원), 링고 스타 1억6000만파운드(2880억원)라고 보도한 적이 있다.
비틀스를 찬양하는 여러 가지 말이 있지만 ‘세계 현대 대중음악은 비틀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최고가 아닐까 한다. 비평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비틀스가 그렇게 성공한 것은 적기적소(right time right place)에 비틀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틀스 노래는 그냥 조금 즐겁고 로맨틱한 리듬일 뿐이어서 다른 시대에 태어났으면 그냥 괜찮은 밴드로 끝났을 텐데 몇 가지 행운이 따랐다는 말이다. 당시는 2차대전 후 처음으로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 주머니에 돈이 돌기 시작했고, 소위 말하는 베이비붐 시대의 아이들이 청년이 된 시기였다. 당시 미국 인구의 35%가 베이비 부머였다. 동시에 세계적으로, 특히 미국에 TV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온 깔끔한 복장의 미남 청년들이 미국인들에게 어필한 것은 당연했다.
비틀스가 위대한 이유
비틀스가 위대한 이유를 음악적 이유를 떠나 단순한 기록으로 한번 살펴보자. ‘비틀스 전까지 관행이었던 싱글 음반이 아니라 앨범을 위주로 음반을 낸 첫 경우’ ‘1970년까지 총 12장의 정규 음반을 발표하며 세계적으로 10억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 기록’ ‘빌보드 핫 100위 50년 역사상 1위 싱글 20곡으로 가장 많이 1위를 차지한 가수’ ‘50여곡 넘는 톱 40위권 싱글’ ‘그래미상 7번 수상’ ‘미국의 인기 프로그램인 에드설리번쇼 출연 때 시청자 수 약 7300만명 기록’ ‘1965년 8월 15일 뉴욕 야구 스타디움 공연에 관객 5만5600명 기록’ ‘최초의 대규모 세계 투어’ ‘전 세계 최초의 위성 생중계인 BBC 프로그램 아워월드(Our World) 출연과 24개국 방송’을 들 수 있다. 거기다가 비틀스 매니아(Beatles mania)라는 세계적인 첫 오빠부대의 등장도 빼놓을 수 없다. 현재 비틀스 멤버 4명의 이름을 딴 인공위성도 지구 궤도를 돌고 있다.
비틀스는 50년 만에 전설이 되어 그들의 발자취는 모두 관광 코스가 됐다. 리버풀에는 ‘비틀스 차일드후드 투어(Beetles Childhood Tour)’라는 관광코스가 있다. 폴 매카트니와 존 레넌이 어릴 때 살던 집을 방문해 둘러보는 관광이다. 두 집 다 영국의 문화재 보호단체 ‘내셔널 트러스트’에 이미 기증돼 관리되고 있다. 비틀스가 유명해지기 전 연주했던 매튜 스트리트(Mathew Street)에 있는 케번 클럽(Cavern Club)도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다행히 펍이라 아직은 입장료가 없다. 이름처럼 동굴 같은 지하로 계단을 한참 내려가야 한다. 벽에는 비틀스의 부조가 조각돼 있고, 무대에는 비틀스가 공연하던 당시 모습이 보존돼 있다.
관광코스로 남은 비틀스
비틀스의 마지막 앨범 ‘에비로드’ 재킷 사진의 배경이 된 횡단보도도 인기다. 최근 에비로드와 관련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 유명한 에비로드 근처 지하철역은 세인트 존스우드(St. John’s Wood)역이다. 그런데 지난해 런던 동쪽 웨스트햄에 에비로드역이 생겨 관광객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온 관광객들은 엉뚱한 동명의 역 근처에 가서 헤맨다. 덕분에 근처 구멍가게는 무려 30%나 매상이 올라서 싱글벙글이지만 인근 주민들은 안타까워한다. 또 진짜 에비로드 횡단보도 근처의 가게들은 런던시에 항의를 하고 난리가 났다. 에비로드와 관련된 다른 얘기도 있다. 재킷 사진 오른쪽 끝에 보면 신사 한 명이 아주 작게 나와 있다. 오래전부터 비틀스 팬들 사이에서는 이 사람이 누구냐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화제의 인물이 밝혀졌는데 미국에서 온 폴 콜이라는 관광객이었다. 관광 와서 우연히 서 있다 유명한 사진에 등장하는 행운을 누린 셈이다. 에비로드 횡단보도는 영국 정부에 의해 2010년에 이미 2급 문화재로 지정됐다. 이 에비로드 횡단보도는 최근 관광지 안내 웹사이트에 리버풀의 케번 클럽이나 앨버트 독의 비틀스스토리박물관을 제치고 비틀스와 관련돼 반드시 가봐야 할 명소 중 1등으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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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007 이야기. 현재 런던 시내는 007 제임스 본드의 최신 시리즈 ‘스카이 폴’의 개봉을 앞두고 ‘007 현상’으로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다. 시내 중심을 다니는 버스의 측면광고는 007 영화 광고로 도배를 했고, 세계 최고급 백화점이라는 런던 해러즈백화점은 건물 전체 쇼윈도를 007 일색으로 장식했다. 시내 바비칸센터 박물관에서는 007 영화에 나오는 각종 소도구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영화 내 소도구 담당 인물인 큐(Q)가 제임스 본드에게 제공하는 비장의 무기들을 수집해 놓아서 본드 팬들에게 인기다. 10월 23일 로열앨버트홀에서 열리는 영화 개봉에는 찰스 왕세자 부부가 참석할 예정이어서 ‘더블 프리미어(double premiere)’라고 언론들이 난리다. 단순한 상업영화 개봉에 찰스 왕세자 부부가 같이 참석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날 입장권 수익을 영국 정보 관련 부서 종사자 은퇴 기금에 제공한다는 형식을 밟아 명분을 세우긴 했지만 굳이 그런 변명을 하지 않아도 새 007 영화에 왕가에서 참석하는 일을 영국 국민 누구도 욕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영국의 자랑 중 하나인 007 영화에 왕가가 관심을 쏟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007시리즈 50년간 26편
한 영화가 시리즈로 50년 동안 26편이 줄기차게 만들어질 정도라면 이건 간단히 볼 일이 아니고 하나의 ‘현상(phenomenon)’으로 봐야 한다. 본드 시리즈는 ‘이제 하나의 단순한 영화 시리즈가 아니다. 문자 그대로 현상이고 이 현상은 불가사의하다(It is not just a simple series of films anymore. It became a phenomenon and the phenomenon. ‘phenomenon’에는 ‘현상’이라는 의미와 함께 ‘불가사의하다’라는 뜻도 있다. 이를 이용한 문장이다)’라는 언론의 평은 절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카디프대학에 ‘제임스 본드의 시대 배경’이라는 강좌까지 개설됐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 첫 영화 ‘닥터 노(Dr. No)’가 나온 해는 1962년이다. 한때 영국은 세계 영화의 본산이었다. 흑백영화 시절만 해도 모든 영화가 영국을 거쳐야 했을 정도다. 할리우드가 본격적으로 영국에서 세계 영화산업을 넘겨받아 시대를 풍미하는 동안 영국 영화계는 변방에 머물러야 했다. 이 본드 시리즈는 그런 영국인들의 영화에 대한 자존심을 보상해주는 역할을 해주고 있다. 비록 제작과 배급은 미국 할리우드 회사들이 하지만 이번 영화 ‘스카이 폴’에서 보듯 감독, 남녀 주연배우, 주요 조연들이 모두 영국인이다. 영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낄 만하다. 그래서 왕세자 부부의 프리미어 참석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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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7 탄생 50주년 기념 포스터가 내걸린 런던 거리. |
본드는 프랑스인? 제임스 본드는 영국인이지만 영국인이 아니다. 제임스 본드는 영국인보다는 프랑스인에 더 가깝다. 영국인은 프랑스인을 부끄러움을 모를 정도로 탐닉하고, 겸손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무례하고, 신중함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경박하다고 싫어한다. 그런데 제임스 본드는 이 세 가지 중에서 다른 것은 몰라도 탐닉적인 면에서 보면 분명 영국인이 아니고 프랑스인이다. 럭셔리한 고속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면서 눈에 보이는 기막히게 예쁜 여자란 여자는 다 손에 넣고 샴페인도 돔 페리뇽이나 볼랭저만 마신다. 이것저것에 억눌린 영국 남자들의 로망을 대변하는 인간형이어서 선망의 적이다.
또 제임스 본드는 보통의 영국 신사들과는 달리 음식에도 상당히 까다롭다. 영국의 요리가 발달하지 않는 것은 영국인 자신 때문이다. 영국인은 음식은 살기 위해 먹는 것이지 프랑스인처럼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철저한 청교도정신의 발로다. 어느 프랑스 학자는 물산이 풍부한 프랑스와는 달리 영국 땅에 먹을 것이 워낙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빈정대긴 하지만 영국인은 종교와 도덕적 신념 때문이라고 강변한다. 어쨌든 영국인은 음식 얘기는 신사가 입에 침을 넘겨가며 탐닉해서 할 얘깃거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식 얘기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라 섹스와 마찬가지로 신사들이 드러내놓고 논의할 사항이 아니라고 근엄한 영국 신사들은 믿는다. 영국 관공서 중에서도 정보부는 외교부 다음으로 가장 보수적이고 좋은 집안 사람들이 근무하는 기관이다. 거기에 근무하는 제임스 본드가 먹고 마시는 것에 탐닉한다는 것은 본드가 프랑스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다. 특히 그들은 제임스 본드가 마티니를 주문하며 “흔들되 휘젓지는 말고(Shaken, not stirred)”라고 주문하는 장면을 보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제대로 된 영국 첩보업계를 그린 소설은 최근 영화화되어 절찬을 받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Tinker, Tailor, Soldier, Spy)’다. 가감 없이 현실 그대로를 냉정하고 직설적으로 다룬 존 르카레의 이 원작은 500쪽이 넘는 대작이다. 사실 영국 첩보계의 역사는 이런 소설보다 더 기이하고 복잡했다. 영국 정보부 소련국장 킴 필비가 소련 스파이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케임브리지대학 출신 스파이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영화로는 그냥 보고 즐기기 좋은 007을 좋아해도 스파이 소설로는 르카레의 소설을 최고로 꼽는다. 셜록 홈스와 애거사 크리스티의 고전적 탐정소설과 그레이엄 그린의 ‘제3의 사나이’ 같은 현실에 가까운 본격 첩보소설만 존재하던 영국 통속소설계에 이언 플레밍은 사람들의 환상이 가미된 ‘판타지 스파이 소설’이라는 새로운 소설 장르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영국 첩보영화는 소설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졌다. 그래서인지 제임스 본드가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다녀도 다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미국 할리우드 영화들처럼 허무맹랑한 영웅들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미국 수퍼히어로 영화들은 소설이 아니라 더 쉽게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만화를 기본으로 만들어졌다. 수퍼맨을 필두로 배트맨, 엑스맨 시리즈 등이 그런 것들이다.
사실 영국인들이 자기네들끼리 즐겨 보면서 좋아하는 영국식 영웅영화는 미국식의 수퍼맨 영화가 아니다. ‘미스터 빈’으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로완 앳킨슨이 주연한 ‘자니 잉글리시(Johnny English)’가 영국인이 좋아하는 대표적 영웅영화다. 세계적으로는 별로 히트는 못 쳤지만 영국에서는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바보 같은 실수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미스터 빈’이 제임스 본드 역할을 한다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을 듯하다. 굳이 설명한다면 바보 같은, 전혀 영웅적이지 못한 영웅이 펼치는 넌센스 첩보활동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하면서 웃고 마는 영국인의 ‘오만한 자학 성향’이 잘 드러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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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드 시리즈 첫 영화 ‘닥터 노(Dr. No)’ |
가장 영국적인 제임스 본드는 2006년 ‘카지노 로열’부터 등장한 6대 제임스 본드인 대니얼 크레이그는 숀 코너리 이후 최고의 제임스 본드라는 평부터 그를 넘어섰다는 칭찬까지 듣고 있다. 실제 대니얼 크레이그는 꺼져가던 007영화를 ‘카지노 로열’ 한 편으로 다시 살렸다. 영국인들은 제임스 본드로 등장하는 배우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적이 별로 없다. 그냥 흥미 본위의 영화에 출연하는 대중적 인기배우 정도로 봤을 뿐이다. 대니얼 크레이그는 그런 통념을 깨고 영국인들 사이에서 가장 영국적인 제임스 본드라는 평을 받는다. 또 영국 여성들로부터는 최근 배우 중 가장 섹시한 영국 남자 배우라고 칭송받는다. 결코 꽃미남 같지 않은, 흡사 건설현장의 노동자를 금방 데려다가 나비 넥타이에 수트를 입혀 놓은 듯 어쩐지 어색하면서도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모습에 영국 여성 관객들은 열광한다. 그래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간의 제임스 본드에 대해 비난을 한다. “왜 흑인 제임스 본드나 게이 제임스 본드는 없느냐”고 말이다. 또 “꼭 잘생긴 제임스 본드만 나와야 하느냐”는 비난을 퍼붓는다. 사실 흑인 배우 윌 스미스가 제임스 본드 제의를 받은 것을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 심지어는 미국인인 브루스 윌리스,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제의를 받았고 영국 가수인 톰 존스도 본드 역 제안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하면 놀란다. 그냥 보고 즐기고 마는 영화 주인공에까지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것인가를 따져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사실 영화계가 정치적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최근 중국을 나쁘게 묘사하는 영화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만만한 북한이 그 악역을 맡는다. 007 시리즈 중 ‘다이 어나더 데이’에는 아예 북한이 제임스 본드의 주 작전지역으로 등장한다. 본드 영화에서 한국인이 등장한 것은 이 영화가 처음은 아니다. 007 시리즈 중 인기가 있었던 ‘골드 핑거’에도 악역 골드 핑거의 부하는 모두 한국인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경호원 겸 운전사로 나온 ‘오드잡’이란 덩친 큰 악역이 압권이다. 오드잡은 고양이 먹기를 좋아하는데, 원작 소설에는 한국에 먹을 것이 없어서 고양이 먹기를 배웠다고 돼 있다. 또 소설에는 ‘킬러를 원한다면 한국에서 찾아라. 반드시 제대로 된 킬러를 찾을 것이다’라는 대사도 나온다. 이언 플레밍이 왜 한국에 대해 그런 인상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골드 핑거’에서 철모자를 던지며 쇠봉을 자르던 오드잡은 일본계 배우였다.
다음 본드걸은 한국인 여배우? 이제 제임스 본드 영화의 꽃인 본드걸 얘기를 할 차례다. 제임스 본드 영화에서 본드걸이 안 나오면 반이 빠진 것과 다름없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늘씬하고 섹시한 여성들은 눈요깃감으로만 등장하는 게 아니다. 정신없이 이어지는 숨 막히는 액션 장면과 그에 따른 긴장을 여성들이 누그러뜨려 주는 역할을 한다. 007시리즈 50년 26편 역사상 제임스 본드는 6명이 나왔지만 본드걸은 영화가 나올 때마다 바뀌었다. 같은 여배우가 본드걸 역을 두 번 맡은 경우는 한 번도 없다. 동양 여배우로는 중국의 양쯔충(楊紫瓊)과 일본 배우가 나왔었으니 이제 한국 여배우가 나올 차례라고 세간에 얘기가 많은데 전혀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닌 듯하다. 본드걸만큼 시류를 잘 좇아 선정한 경우도 드문데 이제는 한국 시장이 할리우드도 무시 못할 만큼 커졌기 때문이다.
영국은 역사적으로 한 번씩 세상을 뒤집는 대중문화를 만들어낸다. 그것도 아주 통속문화로 말이다. 셰익스피어 문학이 지금은 아주 엄숙한 본격문학 취급을 받지만, 400년 전에는 관객들을 웃고 울게 만들던 통속연극의 극본이었을 뿐이다. 찰스 디킨스 소설도 인기 신문 연재 통속소설에 불과했다. 통속적이라고 천시받던 대중문화도 만인에게 사랑받고 오랜 세월이 지나면 존경받는 고급문화가 된다. 50주년을 맞아 비틀스와 제임스 본드는 이미 통속문화를 벗어나 존경받는 대중문화로 들어선 듯하다. 최근 세계를 휩쓸었던 해리포터와 지금은 숨어서 보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도 나중에는 명작으로 존경받는 날이 곧 올 것이다. 이렇게 영국 대중문화의 힘은 알아주어야 한다.
주간조선
글쓴이
권석하
IM컨설팅 대표. 영남대학교에서 무역학을 전공하고 1980년대 초 무역상사 주재원으로 영국에 건너가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유럽 잡지를 포함한 도서와 미디어 저작권 중개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월간 ‘뚜르드 몽드’ ‘요팅’, 도서출판 학고재 등의 편집위원도 맡았다. 케이트 폭스의 ‘영국인 발견(Watching the English·학고재)’을 번역 출간했다. 영국 국가 공인 관광가이드시험에 합격, 관광가이드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