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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비구이 ⓒ 주영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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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bi in Oxford English Dictionary
■ 정의 : In Korean cookery : a dish of beef short ribs, usually marinated in soy sauce, garlic, and sugar, and sometimes cooked on a grill at the table. (한국 음식으로 작은 소갈비 요리는 대개 간장, 마늘, 설탕에 재운 후 종종 식탁의 석쇠(그릴)에 올려 굽는다.)
■ 용례 ① : ‘Gari’ or ‘galbi’ (stewed beef on the bone). (‘가리’ 또는 ‘갈비’(뼈를 발라낸 소고기 조림). Ha Tae-Hung, Folk Customs & Family Life, 1958, p.67.
■ 용례 ② : Kwalbi and boolgogi grilled at your table with hearty servings of side dishes. (푸짐한 반찬과 함께 갈비와 불고기가 여러분의 식탁에서 구워졌다) Transpacific. July 1991, p.62/3.
■ 용례 ③ : For meat-eaters who work up a hunger, Suwon is renowned for its galbi. (배고픔을 달래는 육식주의자들에게 수원은 갈비로 유명하다) Korea Herald (Nexis) 20 September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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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비의 서울 사투리는 ‘가리’다. 갈비에서 살을 발라낸 ‘가리구이’ ⓒ 주영하 |
옥스퍼드 영어사전 갈비 정의
한국어 갈비는 소·돼지·닭 따위의 가슴통을 이루는 좌우 열두 개의 굽은 뼈와 살을 식용으로 부르는 말이다. 하지만 돼지갈비나 닭갈비와 달리 그냥 갈비라고 하면 소갈비만을 가리킨다. 정약용은 18세기 조선식 한자의 어원을 설명한 《아언각비》에서 우협(牛脅)을 조선식 한자로 갈비(曷非)라고 적는다고 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갈비는 “소갈비 요리는 대개 간장, 마늘, 설탕에 재운 후 종종 식탁의 석쇠(그릴)에 올려 굽는다.”라고 정의했다. 이 요리는 정확하게 말하는 ‘소갈비구이’라고 해야 옳다. 하지만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정의처럼, 한국인 대부분은 예전이나 요사이나 ‘소갈비구이’를 ‘갈비구이’ 혹은 그냥 ‘갈비’라고 부른다.
용례①의 저자 하태흥은 뼈를 발라낸 소고기 조림을 ‘가리’라고도 부른다고 적었다. ‘가리’는 갈비의 서울 사투리다. 19세기 말부터 1920년대 초반까지 그 당시 나온 한글 요리책에서는 ‘갈비’라 하지 않고, ‘가리’라고 적었다. 1890년대에 집필된 것으로 여겨지는 《시의전서·음식방문》에는 ‘가리구이’라는 음식 이름이 나온다. 조리법은 다음과 같다. “가리를 두 치 삼사 푼 길이씩 잘라서 깨끗이 빨아 (고기의) 가로결로 매우 잘게 안팎을 자르고 세로 사이도 자르고 가운데를 갈라 좌우로 젖히고 갖은 양념하여 새우젓국에 간 맞추어 주물러 재어 구어라.”
서울의 오래된 이야기에 능통했던 조풍연(1914∼1991)은 가리구이가 어떻게 ‘갈비’가 되었는지를 《서울잡학사전》에 적어놓았다. “1939년께 낙원동에 평양냉면집이 하나 생기더니 냉면과 아울러 가리구이를 팔면서 그것을 ‘갈비’라고 일컫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조풍연의 글에 의하면 손님들은 서울의 평양냉면집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냉면과 함께 갈비 두 대를 시켰다. 그런데 “가리구이 달라”라고 하면 복잡해서 간단히 줄여서 “갈비 두 대”라고 했단다. 이로부터 갈비가 ‘가리구이’의 줄임말로 서울 사람들 사이에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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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비찜 ⓒ 한식재단 |
갈비구이는 본래 선술집의 술안주
식민지 시기만 해도 갈비구이는 선술집에서 술안주로 먹는 음식이었다. 값도 보통 한 대 혹은 두 대에 얼마 이런 식이었다. 1930년 12월 7일자 《동아일보》에서는 강릉의 식당 요리 가격을 기사로 다루었다. 국밥 한 그릇에 15전인 데 비해, 갈비 한 대는 5전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과 비교하면 갈비구이 한 대 값이 설렁탕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갈비구이의 값이 쌌던 이유는 음식 자체의 모양 때문이었다.
1930년대 최고의 요리책 중 하나로 꼽혔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는 갈비구이 먹는 모습을 두고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다. “대체 가리구이와 상추쌈이라 하는 것은 습관으로 좋아서 편하기는 하나, 그러나 이것을 안 먹는 사람이 보게 되면 오직 추하게 보며 오직 웃겠으리오. 그 뜨거운 뼈 조각을 좌우 손에다가 움켜쥐고 먹는 것은 사람이 먹는 것 같지 않고”라고 적었다. 이런 인상 때문인지 1920년대 이후 먹는 모습이 추한 갈비구이는 선술집의 안주였다. 이와 달리 갈비찜은 품위 있게 먹을 수 있어 요릿집에서 신선로 다음가는 고급음식이었다.
1960년대가 되면 사람들은 소갈비라면 갈비찜이든 갈비구이든 상관없이 모두 환영했다. 전후 황폐했던 경제가 제법 안정 상태에 들어서자 명절을 앞두고 정육점에서 소갈비 판매가 절정에 달하고 있다는 언론보도가 줄을 이었다. 당시 소갈비는 명절 선물로 으뜸이었다. 그래서 언론에서는 “아부아첨으로 진상이라는 표현으로 통하고 있는 것이 요즘 소갈비를 바치는 칭호가 되어 있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이런 탓에 소갈비는 명절을 앞두고 예약하지 않으면 구매조차 어려웠다. 암소나 황소를 구별하지 않고 소갈비 한 짝에 4,500원이나 했다. 당시 서울시청 과장 월급이 1만 원 전후였으니, 소갈비 한 짝이 얼마나 비쌌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경제가 성장하자 한국인의 소고기에 대한 욕구는 날이 갈수록 커졌다. 이 무렵 갈비구이는 갈비찜과 함께 고급음식의 반열에 들었다. 쇠고기 수요가 늘자 민간업자인 경동기업에서 1968년 가을부터 뉴질랜드산 쇠고기를 약 300톤을 수입했다. 가격은 600그램에 200원 정도로, 당시 한우가 600그램에 350원이었으니 거의 150원이나 쌌다. 그러나 수입 소고기는 인기를 끌지 못했다. 오히려 수입 소고기로 인해서 ‘한우’ 갈비구이는 술안주에서 고급음식으로 탈바꿈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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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식 왕갈비는 양쪽 갈비다. ⓒ 주영하 |
양쪽 갈비에서 한쪽 갈비로
갈비구이로 이름난 수원갈비도 처음에는 간단한 술안주에서 시작되었다. 수원갈비의 탄생에는 이귀성(1900∼1964)이란 인물이 있다. 그의 후손을 인터뷰한 결과, 원래 이귀성은 1930년대 수원시 팔달구 27-1번지에서 형과 동생과 함께 ‘화춘제과’라는 제과점을 운영했다고 한다. 그 후 이귀성은 1945년 11월경 혼자서 수원 영동시장 싸전거리에서 ‘미전옥’이라는 갈비구이 식당을 개업했다. 장사가 제법 잘되어 2년 후에는 80평짜리 목조건물을 새로 지었다. 그리고 식당 이름을 ‘화춘옥’으로 바꾸어 해장국집으로 운영했다. 그런데 이귀성은 ‘미전옥’에서의 경험을 살려서 해장국에 갈비를 넣어 인기를 끌었다. 그 이듬해인 1946년에는 갈비에 양념하여 숯불에 구워내는 갈비구이를 메뉴에 보탰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을 갔던 이귀성은 그곳에서도 갈비 기술을 전수하여 ‘해운대갈비’를 탄생시켰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수원으로 돌아온 이귀성은 1953년 영동시장 싸전거리가 불타자 수원시에서 제공한 팔달로 근처로 자리를 옮겨 다시 영업을 시작했다. 마음씨 좋던 이귀성은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던 손님들에게 외상을 자주 주는 바람에 이익을 크게 보지 못하고 곤경에 빠졌다.
1960년대 초 공무원이던 아들 이영근이 화춘옥 경영을 맡으면서 갈빗집은 제 궤도에 올랐다. 하지만 1960년대 초반까지도 갈비구이만을 전문으로 하지는 않았다. 당시 주메뉴는 갈비구이와 함께 해장국·갈비탕·설렁탕·냉면이었다. 맛이 좋다는 소문이 나자 새마을운동을 격려하고 벼 품종을 개량하는 데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던 박정희 대통령도 수원에 있는 농촌진흥청에 들르면서 화춘옥의 단골이 되었다. 화춘옥 덕택에 팔달로 근처는 점차 갈빗집 식당촌으로 변해갔다. 그 후 1979년 영동시장이 도시 개발로 사라질 처지가 되자, 수원갈빗집들이 법원사거리 근처로 대거 이전하여 수원 갈비촌을 이루었다.
용례 ③은 2018년 추석 연휴를 앞두고 서울에서 발행되는 영자 신문의 기사다. 본래 이 기사의 전문은 “배고픔을 달래는 육식주의자들에게 수원은 갈비, 즉 양념 소갈비로 유명하다.(For meat-eaters who work up a hunger, Suwon is renowned for its galbi, or marinated beef ribs.)”다. 2000년대 전후만 해도 갈비구이에 쓰이는 한우는 재래식과 미국식의 두 가지 방식으로 키워졌다. 미국식은 미국산 사료만 먹여 육질이 좋았다. 하지만 재래식은 소여물을 먹여 고기 냄새가 많이 났다. 고기 냄새를 해결하는 방법은 갈비를 ‘양조간장+마늘+파+생강+배+사과+설탕’ 등으로 양념하는 것이다. 생갈비도 ‘소금+마늘’등의 양념을 하지만, 양념갈비에 비해 고기 자체의 맛이 핵심이다. 한국의 갈비구이 음식점에서 양념갈비구이가 생갈비구이보다 싼 이유는 고기의 품질 때문이다.
갈비구이는 일반 가정에서는 먹기 힘든 고급 음식점의 메뉴다. 음식점의 구이용 갈비는 소고기 부위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구워서 먹기 편하게 손질하는 것이 필수다. 갈비를 손질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왕갈비’라고 불리는 수원식 갈비다. 수원식 갈비는 갈비의 뼈에 붙은 양쪽 살코기를 그대로 잘라낸 것처럼 뼈에 살을 양쪽으로 붙여서 손질한다. ‘양쪽 갈비’라고 부르다가 2010년대 이후 ‘왕갈비’라고 부르는 수원식 갈비는 크기가 어른 손바닥만 하다. 다른 하나는 갈비의 뼈를 두 쪽으로 잘라 뼈 한쪽에만 살코기를 붙이는 한쪽 갈비 방식이다. 이런 방식의 갈비는 1980년대 초반 서울의 강남에 자리 잡은 갈비구이 전문점에서 이문을 많이 남기려고 갈비의 뼈를 나누어 사용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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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 갈비 ⓒ 주영하 |
LA갈비의 등장
1980년대 한국 사회는 소갈비 수요가 급증했다. 매년 연말이 되면 소갈비를 중심으로 구성한 소고기 선물 세트가 백화점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연말이나 명절을 앞두고 수요 급증으로 인해서 소갈비의 값은 날이 갈수록 치솟았다. 정부는 1988년 겨울, 치솟는 소갈비 값을 안정시키기 위해 비공개적으로 미국에서 갈비 270톤을 긴급 수입해 시중에 공급했다. 그러나 한국인 대부분은 미국산보다 한국산 소갈비를 더 선호했다. 그래도 정부는 1989년 가을, 추석을 앞두고 또 미국에서 소갈비를 수입했다.
이런 와중에 일부 유통업체에서는 미국산 소갈비를 한우로 속여서 판매하다 검찰에 적발되었다. 1992년 2월 설날을 앞두고 서울의 유명 백화점에서는 미국산 소갈비를 국산으로 속여 팔았다는 혐의를 받아 관계자들이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대부분의 백화점 관계자는 혐의를 부인했고, 그중 한 백화점 관계자는 제품진열대에 ‘LA식 갈비’라고 써 붙여놓았으므로 소비자를 속인 적이 없다고 밝혔다.
여기에서 ‘LA식 갈비’는 미국에 사는 유대인들이 먹는 소갈비인 프랑켄 스타일 립(Flanken Style Ribs)을 가리킨다. 앞에서 소개한 한국의 ‘양쪽 갈비’나 ‘한쪽 갈비’는 갈비 옆에 붙은 살을 칼로 넓게 펴낸 형태이지만, 프랑켄 스타일 립은 갈비뼈 전체를 뼈의 직각 방향으로 잘라서 갈빗살 사이사이에 조그마한 갈비뼈가 붙어 있는 형태다. ‘LA식 갈비’의 유래에 관한 주장은 여럿이 있지만, 아직 정설은 없다. 이 중 1960년대 중반 미국의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한국인이 당시 유대인이 운영하던 정육점에서 판매하고 있던 프랑켄 스타일 립을 좀 더 얇게 잘라 달라고 주문하여 한국식 소갈비찜과 소갈비구이를 만들어 먹었던 데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가장 유력하다.
LA갈비 구이의 요리법은 한국산 소갈비 구이와 비교하면 요리법이 매우 간단하다. 찬물에 30분 정도 담가서 핏물을 뺀 후 가볍게 물기를 없애고 양념장에 재웠다가 구우면 된다. 대체로 단맛이 강해서 어린이나 젊은 층이 즐겨 먹는 음식이다. 그러나 LA갈비는 1990년대 초반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후 해가 갈수록 값이 올라서, 지금은 한국산 갈비에 버금갈 정도로 비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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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서울 강남의 갈비집은 한국인 최고의 명소였다. ⓒ 매일경제 1997년 5월 13일자 |
대한민국 갈비열전
1990년대 이후 갈빗집으로 유명해진 곳을 열거해보면, 수원갈비를 비롯하여 서울의 마포갈비, 부산의 해운대갈비, 경기도 포천의 이동갈비, 그리고 광주광역시 송정과 전라남도 담양의 떡갈비를 들 수 있다.
서울의 마포갈비는 일반적으로 ‘대포갈비’라고도 부른다. 원래 마포갈비는 소고기보다 돼지고기를 주재료로 한 갈비였다. 지금 마포대교가 들어선 곳에 예전에 마포나루가 있었는데, 나루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구워 먹던 갈비가 상업적으로 집단촌을 형성하면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이에 비해 해운대갈비는 석쇠에 굽지 않고 쇠로 만든 불고기판에 양념한 갈비를 쌓아놓고 구워 먹는다. 국물이 냄비에 남기 때문에 여기에 밥을 비벼 먹으면 일품이다. 아마도 1960년대 갈빗집의 명성을 처음으로 전국에 드날린 것은 이 해운대갈비다.
이동갈빗집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는 1987년을 전후해서다. 그 이전부터 포천시 이동에 갈빗집이 한둘 있었지만, 1980년대 중반 경제가 급속하게 좋아지면서 갈비 수요가 늘어나자 이에 편승해서 이동갈비도 소문을 타게 되었다. 산행하기 좋은 아름다운 산들이 주변에 많은 데다, 군부대가 즐비하여 이곳을 지나다니는 외지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입을 통해서 이동갈비가 맛있으면서도 값이 싸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당초 이동갈비는 양이 많은 편이었다. 더욱이 전국에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서 지역적 특색이 강하지 않은 평균적인 맛을 유지했다. 이것이 이동갈비가 유명해진 이유라 할 수 있다.
송정리와 담양의 갈비는 수원갈비나 이동갈비와 달리 떡갈비다. 떡갈비는 갈빗살을 발라내서 여기에 양념하여 다시 갈비뼈에 붙인 후 석쇠에 구워내는데, 비록 뜯어먹는 재미는 덜 하지만 입에서 씹히는 갈빗살 맛이 일품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 떡갈비는 갈비에서 살코기를 다 뜯어내고 버려야 마땅한 뼈에 마치 살이 많이 붙은 갈비처럼 만들어 먹으면서 생겨난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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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남도 담양의 떡갈비 ⓒ 주영하 |
갈비의 세계화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으면서 베이징에는 한국식 갈비구이 음식점이 100여 군데가 넘게 생겼다. 당시 베이징의 시니어 대학교수 한 달 급여가 100달러(US)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베이징의 고급 한국식 갈비구이 음식점의 갈비 1인분 가격은 50달러(US)에 버금갔다. 하지만 개혁개방의 혜택을 빨리 받은 일부 부유층 중국인은 현금다발을 들고와서 한국식 갈비구이를 먹었다.
용례 ②의 “푸짐한 반찬과 함께 갈비와 불고기가 여러분의 식탁에서 구워졌다.”라는 내용처럼 그릴이 장착된 식탁에서 구워내는 갈비구이의 맛은 중국 부유층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더욱이 10가지가 넘는 반찬과 양념게장, 그리고 쌈 채소를 ‘무한리필’로 제공해주는 한국식 갈비구이는 시장경제의 맛을 들인 중국인의 입맛을 유혹했다.
1990년대 미국 뉴욕의 맨해튼 32번가 한국 음식 거리에도 갈비구이 전문점이 들어섰다. 뉴요커들은 갈비구이집에서 골목으로 퍼져나오는 냄새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맛있게 먹은 후에 생겼다. 외투에 베인 갈비구이의 냄새는 추가 세탁비를 내야 했다. 1990년대 말에 구울 때의 연기도 빨아들이는 그릴 식탁이 발명되었다. 2020년대 이후 런던, 파리, 베를린 등지의 한국식 갈비구이 음식점은 성업 중이다. 이들 도시의 몇몇 정육점에서는 아예 한국식 갈비를 판매하는 곳도 있다.
갈비구이의 맛은 양념갈비든지 생갈비든지 양념에서 나온다. ‘갈비+양념’은 하루 정도 재워두는 발효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맛으로 변신한다. 이 ‘갈비양념’을 활용한 한국식 소스는 고추장처럼 새로운 소스로 K푸드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다. 이것이 지난 150년 동안 서울식 ‘가리구이’가 드라마틱한 한반도의 역사 속에서 진화해 온 결과다.
글 :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음식을 문화와 역사학, 사회과학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음식인문학자(문화인류학박사)로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다. 2024년 9월부터 1년간 SOAS 한국학센터 방문학자로 런던에 체류 중이다.
저서 :
《음식 인문학: 음식으로 본 한국의 역사와 문화》(2011),《식탁 위의 한국사: 메뉴로 본 20세기 한국 음식문화사》(2013, 베트남·일본·태국에서 번역출판),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 식사 방식으로 본 한국 음식문화사》(2018, 타이완에서 번역출판), 《조선의 미식가들》(2019), 《백년식사: 대한제국 서양식 만찬부터 K-푸드까지》(2020), 《음식을 공부합니다》(2021), 《그림으로 맛보는 조선음식사》(2022, 중국에서 번역출판), 《분단 이전 북한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일제강점기 북한 음식》(2023), 《글로벌푸드 한국사》(2023), 《국수: 사람의 이동이 만들어 낸 오딧세이》(2025)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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