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 가운데 가장 맛있게 음료수를 마셨던 기억은 훈련 중 상무대 PX에서 마셨던 콜라입니다. 훈련을 마친 직후 목이 너무 마를 때라 콜라 한 병이 모자라 평소와 달리 한 병을 더 시켜서 마셨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소화가 좀 안 된다 싶으면 콜라를 시켜 마시기도 합니다. 그럴 때에는 얼음을 가득담은 컵을 주문한 다음, 콜라를 조금 넣은 후 희석해서 마십니다. 콜라가 몸에 좋은 음료가 아니라는 생각에 적게 마시고 싶기도 하고 얼음에 희석되면 콜라가 덜 달아서 입맛에도 잘 맞기 때문입니다. 남은 음료는 스튜어디스에게 그냥 치워달라고 부탁합니다. 아주 목마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마름의 정도가 마실 음료의 양을 결정하고 얼마나 목마른가가 마실 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결정합니다.
세상을 볼 때 두 가지 그림이 떠오릅니다. 메마른 땅과 목마른 나그네의 모습입니다. 뜨거운 태양을 받아 땅은 마르고 갈라져 있습니다. 강줄기는 이미 말랐고 바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무와 풀들은 말라비틀어졌고 동물들은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생명이 빠진 세상의 모습입니다. 마셔도 마셔도 목마른 세상의 모습입니다. 생기도 만족도 없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태양이 내려쬐는 황폐한 길을 한 나그네가 걸어가고 있습니다. 옆에 차고 가던 물 자루는 이미 동이나 버렸습니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입은 말랐고 입술은 갈라져 있습니다. 온 몸은 탈수 상태에 빠져있습니다. 나그네는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물을 찾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생명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한국 땅이 편안하지 못하다는 생각입니다. 한국은 황막한 땅입니다. 그런데 어디 한국뿐입니까? 한국과 영국, 미국, 그 어느 곳이든 이 땅의 삶은 황막한 광야나 사막을 여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사막을 여행하는 나그네와 같이 항상 갈급합니다. 사막 한 가운데에서 물이 없으면 생명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사막이 메마르고 건조하다고 해도 생명의 물이 흐르는 오아시스를 알고 있다면 얼마든지 생명을 누리며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팬데믹 기간에 한국을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2주간의 격리를 마치고 집을 탈출 한 후, 처음으로 제가 선택한 메뉴는 평양냉면이었습니다. 배가 불렀음에도 냉면 국물을 더 시켜서 마셨습니다. 처음에는 냉면 국물을 마셨지만 나중에는 자유를 먹고 해방을 마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자유와 해방을 실컷 먹고 마셨습니다. 우리의 갈급함은 육체적 갈증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북편 지방은 갈릴리 지방, 중간은 사마리아 지방, 남쪽은 유다지방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 세 지방을 연결하는 것이 요단강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있어서 요단강은 너무나 소중한 수자원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본래 물이 귀한 나라입니다. 이스라엘 성지 여행 중, 남쪽을 여행하다가 북쪽에 있는 갈릴리에 이르면 왜 그들이 갈릴리를 바다(많은 물)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됩니다. 광야가 많은 남쪽과 달리 갈릴리에는 생명이 살아서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많은 물의 근원이 고작 3개의 샘으로부터 공급받아 이루어진다는 설명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갈릴리 북부에 위치한 단 샘물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단 샘물은 갈릴리의 수원이 되는 3개의 샘물 중 나머지 2개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을 생산하고 있다고 합니다. 연간 무려 2억 34만 큐빅을 생산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샘 근원의 모습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 밑의 개울과 비슷한 규모였습니다. 도랑 정도의 물이 흘러 넘쳐서 갈릴리의 많은 물을 이룬다는 설명을 실감하기 어려웠습니다. 이것이 샘의 위력인가 봅니다.
여리고를 방문하면서 같은 마음을 느꼈습니다. 여리고는 유대광야 한가운데 놓인 오아시스입니다. 여리고가 나무가 우거지고 농사가 가능한 지역이 된 것은 그곳에 샘물이 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여리고 지역에 있는 엘리사의 샘을 방문하였을 때, 너무나 의외의 광경에 놀랐습니다. 상상했던 것과 달리 샘의 근원은 너무 고요했습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물이 솟아오르는 것도 알아채기 어려울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샘물 7개가 모여 광야에 오아시스를 만들었습니다. 고요한 샘 6개가 여리고 땅을 생명이 자라는 푸른 지역으로 만들었습니다.
댐과 샘의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요? 댐은 용량이 크지만 한계가 있고 샘은 적은 양이라도 계속 물을 생산해 냅니다. 엄청난 규모의 댐들도 때로 가뭄이 들면 바닥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댐이 그 거대한 수문을 닫고 물을 방출하지 않으면 댐 아래에 위치한 강과 저수지들도 바닥을 드러내고 모든 농지들이 바싹 바싹 말라 들어갑니다. 또 한 가지 다른 점은 샘은 댐과 달리 깨끗한 물을 생산합니다. 댐에 담긴 물은 샘만큼 깨끗하지 않습니다. 댐의 바닥은 침전물과 오물들로 더렵혀져 있습니다. 고인 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샘물은 항상 솟아오르고 흐르기 때문에 깨끗합니다. 샘은 살아있는 생명의 물입니다.
내 이름에 샘 천(泉)자가 들어 있습니다. 예전에 이왕이면 강이나 바다라고 이름을 지어주시지 왜 샘이라고 지었을까 조금 아쉬운 마음을 품은 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다녀온 후 그런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샘이 일곱 개 모이면 광야를 오아시스로 만들 수 있고, 제대로 솟아 흐르는 샘이 3개만 되어도 갈릴리와 같은 바다(많은 물)를 이룰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초막절 때마다 행하는 예식이 있었습니다. 7일 동안 매일 아침, 금 항아리를 이고 가는 제사장을 사람들이 엄숙한 행렬을 지어 뒤따릅니다. 그들은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 와서 성전의 제단 서쪽 편에 놓인 은그릇에 붓는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제 8일에는 이 행사가 없었습니다. 이 날에 그리스도께서 성전 앞 눈에 띄는 장소에 서서 큰 목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한복음 7장 37절-39절)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의 물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이후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수인 성령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인생길은 광야와 같이 메마르고 목마른 길입니다. 목마름을 해결해 줄 생명의 물은 우리에게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배에서 생수가 솟아나고 강처럼 흐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의 삶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리하여 생명의 물을 마음껏 마시고 또 나누어 주는 풍성한 삶을 누리기 바랍니다.
김석천 목사
행복한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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