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와 재능이 만나 감동이 되었습니다.
바쉬메트같은 비올라의 파이오니어들의 노력은 악기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래서 비올라는 미래의 악기가 되었다. 칸첼리나 구바이둘리나같이 주요 현대음악가들이 앞다퉈 비올라에 대한 곡들을 작곡하고 있다. 가끔은 무색 무취로, 가끔은 중용으로 느껴지는 비올라의 그 음색은 거장을 기다리며 아직 그려지지 않은 거대한 캔버스다.
그리고 여기 한 명의 미래의 연주가가 미래의 악기를 들고 나왔다. 리처드 용재 오닐. 비올리스트 최초로 줄리어드 음악원의 아티스트 디플로마 프로그램에 입학한 촉망되는 연주자.. 미들 네임 용재는 줄리어드 음대 강효 교수의 부인이자 세종솔로이스츠 대관령국제음악제 행정감독인 강경원이 지어준 이름. 일찍이 구김 없고 똘망똘망한 그를 보니 용기와 재능이란 이름이 절로 떠올랐다고 한다. 세종솔로이스츠와 링컨 체임버 뮤직 소사이어티에서 활동중인 그의 이름은 KBS 휴먼 다큐멘터리 인간극장에 그의 삶이 방송되며 안방에 회자됐고 뜨거운 호응으로 속편까지 제작, 방송됐다. 팬카페에는 순식간에 1천여 명의 여성 팬들이 몰려들었고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첫 독주회는 사흘 만에 티켓 전량이 팔려 나갔다.
지난 2004년 8월 대관령국제음악제에서 세종솔로이스츠의 연주를 직접 관람했을 때도 그의 비올라가 눈에 들어왔다. 민첩하고 씩씩한 움직임, 신중하면서도 자신감이 느껴지는 절도있는 동작에서 리처드 용재 오닐의 이름이 다시 한 번 각인되었다.
방송에서도 소개된 바 있지만 그의 삶은 결코 평탄치 않았다. 그의 어머니 콜린 오닐은 전쟁고아로 1957년 미국으로 입양됐다. 어려서 열병을 앓은 뒤 정신 지체를 가지게 됐고 미혼모인 채로 용재를 낳았다. 장애로 인해 용재를 돌보기가 여의치 않았던 어머니, 그러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정성은 친부모 못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고등학교 이전까지 레슨을 받던 장소는 차를 타고 왕복 네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여든이 넘은 할머니께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먼 길을 당신께서 손수 운전하시며 10년 동안 한결같이 보살펴 주셨다"고 용재는 말한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용재는 15세가 되던 해, 그토록 자신을 따사롭게 보살펴 주었던 외조부 곁을 떠났다. 더 큰 강으로, 그보다 더 큰 바다로 나아가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비올라라는 악기로 귀착됐다. 용재는 넉넉지 않은 살림에 고학으로 비올라에 용기와 재능을 불태웠다.
"비올라는 수세기 동안 주목 받지 못했던 현악기다. 바이올린의 경우 파가니니의 24개 카프리스를 기반을 둔 주법이 현재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나 비올라는 20세기 비올리스트 출신 작곡가의 작품이 레퍼토리의 큰 축을 이루고 있다. 그만큼 낯설다. 나는 그 낯선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낯선 이국 땅에서 낯선 악기로 낯선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하는 이방인. 그러나 하이든이래 수많은 명곡들을 낳은 현악 4중주를 비롯한 실내악 명곡들은 리처드 용재 오닐이 만들어 내는 비올라의 음색으로 완성된다. 패션이 구두에서 완성되듯이 그의 연주는 전체적인 앙상블에 강렬한 구두점을 찍는다.
그의 삶에 대해 알게 된 수많은 저널리스트들이 한국계 미국인 용재 오닐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여기 그 대답을 대신해 본다. 그는 한국인이며 미국인이다. 아니,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세계인이다. 그는 더 이상 아픈 과거의 상처를 씻지 못한 리처드가 아니다. 미래의 예비 거장을 예약한 용기와 재능의 리처드 용재 오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