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직장암 환자 분이 오셨다. 얼굴이 어두웠다. 병은 그동안 살아온 삶을 돌아보라는 몸에서 보내는 신호다. 습관들을 바꾸면서 치료를 받으면 얼마든지 나을 수 있다며 “용기를 가지시고 즐겁게 생활하세요”라고 말씀을 해드렸다. 그분은 한결 편해진 얼굴로 돌아가셨다. 희망의 이야기를 자신 있게 해줄 수 있는 의사. 마음수련을 하고 언젠가부터 난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평범한 가정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1등으로 살아가는 형과 누나를 보면서 나도 공부에 매달렸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오는 순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방황을 시작했다. 휴학 그리고 복학 후 학생회장을 하게 되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강하게 밀어붙이는 나에게 동기들도 지치고 실망한 채로 내 곁을 떠나갔다. 결국 나는 중도에 학생회장을 사퇴하였다.
이후 내 주위의 소중한 모든 것들이 나를 떠나갔다. 아니 떠나가고 난 뒤에야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고, 어깨는 무거웠고 머릿속에는 생각들이 가득 차서 소화불량에 불면증까지 겹쳤다. 졸업하고도 갈팡질팡했다. 친구가 권했던 마음수련이 떠올랐다.
나는 27년간 살면서 처음으로 지나온 과거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나름대로 바르게 살아왔다 생각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나에게 주어진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는 걸 알았다. 마음을 열지 못한 채 강하게 보이려고 애쓰며 살아온 것이다. 내 안의 열등감과 나약함을 감추려고만 했다.
그 마음을 버리며 매 순간 만났던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다. 자연스레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를 탁 놓고 나니 참 나의 본성이 보였다.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 편해지고 어깨의 무거운 통증이 사라졌다. 그리고 잠도 잘 잘 수 있게 되었다. 변화된 내 모습을 보고 부모님도 수련을 시작하셨다.
어느 날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다. “여보, 내가 그동안 정말 잘못했소.” 33년 만에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하신 말씀.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눈물로 지난 세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놓으실 수 있으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자상하고 성실한 분이었지만 어머니한테는 짜증도 많이 내셨던 편이었다. 아버지 안에 쌓였던 그 많은 한을 가장 편한 어머니에게 그렇게나마 표현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집안 사정으로 국민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지만 근면하고 성실해 공무원 시험을 통과하셨다.
능력은 있었지만 학력 때문에 매번 받게 되는 불평등한 인사 구조. 그리고 이른 나이에 죽은 막내 삼촌과 군대에 갔다 실종된 큰삼촌으로 인해 술만 드시면 억눌렀던 울분을 터트리셨다. 수련을 하면서 아버지와 대화를 하게 되었다.
아버지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많이 울었다. 그 한을 다 안고 계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아버지는 수련을 하며 그 한을 다 내려놓고 나니까 마음이 홀가분하다고 하셨다. 그 이후로는 술 드시고 우시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부모님은 이제 “네 걱정은 안 한다”고 하신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계신 두 분은 수련 이후 훨씬 행복한 두 분만의 달콤한 시간을 보낸다고 하신다. 나 역시 예전에는 일을 할 때 내 뜻대로 안 되면 강하게 채찍질했고 누가 조언을 해줘도 다 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내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고 나니 이제는 수용하면서 듣게 되었다.
그리고 일의 성과보다는 사람을 챙기는 쪽으로 일을 하게 된다. 아무리 성과가 좋아도 그 속에서 사람들이 힘들어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게 하다 보니 자연스레 일이 진행된다. 내 스스로도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놓고 나니까 많이 편해졌다. 그래서인지 주위 사람들이 나를 많이 편안해하는 것 같다. 행복한 바보가 된 듯한 기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