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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보는 6・25 전쟁관은?
2010-08-13, 18:28:52
오유방스
추천수 :
390
| 조회수 :
3160
6・25 전쟁의 4대 참전국은 한국, 북한, 중국, 미국이었다. 전쟁 발발 60주년인 올해 4개국의 움직임은 제각각이다. 게다가 천안함 침몰 사건까지 겹쳐지면서 한반도의 안보정세는 마치 60년 전으로 돌아간 듯 복잡하게 흘러가고 있다.
한국은 6・25 전쟁을 적화통일 야욕을 가진 김일성이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지지, 묵인 아래 일요일 새벽 전격 남침을 단행해 낙동강선까지 밀고 내려왔지만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의 반격으로 압록강까지 진격 북진 통일을 거의 이룰 수 있었지만 중공군의 전격 참전으로 다시 후퇴, 38선 부근에서 공방을 벌이다 53년 휴전협정에 조인한 전쟁으로 보고 있다. 미국은 국익에 반하는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총력을 다해 참전한 전쟁이었다. 북한이야 ‘조국해방전쟁’으로 보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 참전국 중국은 신생국가이며, 내전이 종식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왜 전쟁에 참전했던 것일까? 또한 지금은 6・25전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 속내를 볼 수 있는 보도가 최근 나왔다.
지난 7월1일 중국 국방대학전략교육연구부 교수인 현역 소장 쉬옌(徐焰)이 인민망의 토론방인 강국논단에서 기획한 특집 프로그램 ‘문사대강당(文史大講堂)’에 나왔다. 그는 ‘조선전쟁 60주년’을 주제로 사회자와 네티즌들과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은 주요 내용.
◇‘조선전쟁’은 무승부로 끝났지만 항미원조전쟁은 위대한 승리=‘조선전쟁(중국에게 Korea의 번역어는 조선과 한국 두개다. 공식적으로 KOREA는 조선으로 번역한다. 따라서 우리가 한국전쟁(Korean War)이라고 부르는 전쟁을 조선전쟁으로 부른다)’이 중국 및 기타 각 방면에 끼친 영향을 이야기 하겠다. 60년전인 1950년6월25일 중국의 동쪽 국경을 마주한 한반도에서 제2차세계대전 이래 최대 규모의 국부전쟁이 발발했다. 6월25일 ‘조선내전’이 폭발했다. 2일 후 6월27일 국제 전쟁으로 변했다. 미국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4개월 후인 10월25일 중국이 정식으로 참전했다. 지원군이란 명목이었다. 이때부터 중국인민의 항미원조전쟁이 시작됐다. (내전국제전항미원조전쟁)
중국의 대다수 중장년 세대에게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은 추억을 상기시키는 익숙한 전쟁이다. 하지만 최근 새로운 각종 자료가 공개되고 매체들이 발달함에 따라 그 전쟁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중국의 국가이익을 수호한다는 정확한 관점에서 전쟁을 바라봐야 한다. 마치 외계인이 지구의 일을 보는듯한 공정, 객관은 불가능하다. 국가마다 자신의 입장이 있다.
조선전쟁은 한반도 남북 민중에게 커다란 손실을 끼침과 동시에 아시아 및 세계적인 전략 구조를 바꿔 놓았다. 중국이 전쟁발발 4개월 후에 참전한 것은 부득이한 것이었다. 중국이 항미원조전쟁을 진행한 것은 중국의 안전을 보위하기 위한 것임과 동시에 국제의무를 이행한다는 두가지 목적을 위해서였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조선전쟁’은 무승부로 끝났지만 항일원조전쟁은 위대한 승리를 거뒀다는 점이다. 최근 중국내에 두가지 잘못된 인식이 나오고 있다. 첫째, ‘조선전쟁’과 항미원조전쟁이라는 두 가지 다른 개념을 혼동하는 것이다. 둘째, 중국이 조선에 출병한 원인을 조선반도만을 두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주요한 요소인 대만문제를 회피한다. 이 두 착오와 모호한 인식은 일련의 잘못된 결론을 불러온다. 최근 중국 내외의 적대세력은 ‘조선전쟁’에 관한 역사 문제에 대해 모욕적인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 특히 인터넷을 통해서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중국인들은 ‘조선전쟁’의 폭발에 대해 당연히 토론할 수도 서로 다른 인식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위대한 항미원조전쟁에 대해서는 반드시 충분히 긍정적이여하며 명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조선전쟁’은 해선 안된다. 단, 항미원조전쟁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를 잘 인식하는 사람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조선전쟁’과 항미원조전쟁 이 양자는 서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이 두 전쟁은 서로 다른 개념을 갖고 있다. 시간적으로 보자. ‘조선전쟁’은 1950년6월25일 발발했다. 항미원조전쟁은 10월25일 발발했다. 4개월의 차이가 있다. 10년전인 항미원조전쟁 50주년 본인은 중국의 영자지에 ‘조선전쟁 기념’이라는 말을 써서 당시 느낌을 탄식한 바 있다. 이는 편집자의 개념이 모호했기 때문이다. 중국인은 ‘조선전쟁’의 발발을 기념할 수 없다. ‘조선전쟁’은 중국 자신의 이익과 원래의 바램을 위배한 것이기 때문이다.
90년대 이후, 러시아 사료가 대거 비밀해제됐다. 1956년9월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 제8차 대표대회에 참가한 미코얀과 회견하면서 스탈린의 태도를 비판했다. ‘조선전쟁’의 발발 초기는 조선 내전이었다. 다른나라가 간섭하면 안됐다. 중국인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기념해야할 중국을 보위한 커다란 의의가 있는 기념일은 10월25일이다. 당연히 1950년6월25일 이 전쟁은 발발했다. 참전 시점이 다른 각 주체는 서로 다른 호칭을 갖고 있다. 이는 각각 그들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앉아있는 엉덩이가 입을 결정하는 것이다.
조선인민공화국정부는 오랫동안 6월25일에 거창한 기념활동을 거행했다. 이날은 조국해방전쟁기념일이다. 이는 그들이 보는 이 전쟁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미국과 기타 서방국가는 이 전쟁을 ‘조선전쟁’이라 부른다. 영어로 말하면 조선과 한국은 같다. 중요한 것은 중국어로 어떻게 번역하느냐다. 한국 측은 자존심이 있어 ‘한국전쟁’이라고 부른다. 이런 방법은 엄격히 말하면 약간의 문제가 있다. 조선반도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이 전쟁을 단순히 ‘한국전쟁’이라고 개괄한다면 이것이 모든 측면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까? 대만당국은 그 당시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에서 한국의 호칭을 사용했다. 줄여서 ‘한전(韓戰)’이라 불렸다. 당시 중국인이 이 말을 사용했다면 국민당의 용어를 긍정한 셈이었다.
◇대만문제는 마오쩌둥의 조선출병을 결정하게한 중요한 요소=당시 전쟁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이 있다. 따러서 서로 다른 기념 활동을 벌이고 있다. 조선은 매 해 6월25일을 기념한다. 미국은 기념하는 경우가 적다. 미국 오마 넬슨 브래들리 초대 합참의장은 “한국전쟁은 잘못된 전쟁”이라며 “전쟁이 공산중국까지 확대됐다.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적과 진행한 잘못된 전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조선전쟁’은 변화의 과정을 겪었다. 시작은 조선 북남 쌍방의 내전이었다. 이틀 후 미국의 참여로 국제전쟁으로 변했다. 이전에 이승만이 대통령이었던 한국정부는 통일을 부르짖었다. 김일성은 조국해방 실현을 주장했다.
현재 여러 매체에서 누가 먼저 침범했는가라는 문제를 뜨겁게 다루고 있다. 이는 말하기 어렵다. 1950년 연초에 쌍방은 이미 대대급 이상의 규모의 전쟁이 발생했었고 최종 연습이 전면적 내전이 된 것이다. 조선민족의 분열이 진화하여 이후의 내전이 된 것이다. 실제 미국과 소련 양국이 2차대전 이후 세력 범위를 나누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다. 1945년8월1일 미소 각자는 자기의 세력 범위를 만들었다. 조선 내전 상황에 대해 중국은 매우 늦게 소식을 알 수 있었다. 1950년 중앙정치비서실주임 겸 마오쩌둥의 러시아통역의 회고록에 따르면 전쟁 발발 후에야 그 소식을 알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조선에서의 내전 발발은 그들 국가의 내정이다. 단순히 그들 자신의 내정으로 중국은 간여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미국이 연합국을 조종하여 조선 북방이 남방을 침략했다는 중상모략[誣蔑]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90년대 이후 본인은 일련의 국제 회의에 참가해 ‘조선전쟁’에 대해 연구 토론하면서 미국측 학자들과 많은 부분에서 일치되는 시각을 갖게 됐다. 하지만 한가지 어휘에서는 논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인은 북측이 남측을 침입했다고 한다. 나는 절대 이런 표현을 반대했다. 중국군인은 이를 동의할 수 없다. 단지 6월25일은 내전이 시작된 날이라고만 말할 수 있다. 이 용어의 다툼은 사실 전쟁의 성질과 관련된 것으로 적은 문제가 아니다. 국제적으로 공인된 원칙에 따르면 1954년 통과된 UN헌장을 포함해 연합국은 한 국가의 내부 사무에 간여할 수 없다. 당시의 조선 북남 쌍방은 모두 하나의 조선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런 정황 아래서 누가 먼저 행동을 취했냐는 모두 침략이 아니다. 마치 19세기 미국의 남북전쟁과 같다. 미국의 북방이 남방을 침략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미국이 마침 조선 내전을 구실로 이 기회를 이용해 조선에 출병하고 중국 대만을 점령했다. 이 처럼 전쟁의 성질이 곧 변화했다. 미국에 대해 말한 다면 이는 ‘조선 침략 전쟁’이었다.
‘조선전쟁’은 내전에서 여러 국가가 참가한 국제전쟁으로 바뀌었다. 이런 각도에서 국제 준칙에 따라 본다면 미국의 타국에 간섭하는 패권주의적 태도가 ‘조선전쟁’을 확대하는 원인이 됐다. 당연히 ‘조선내전’이 이렇게 변화된 것은 당시 소련과 중국의 수뇌부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조선전쟁’은 냉전시기 첫 대규모 열전이었다. 그 결과 한 작은 나라가 대국을 대규모 전쟁으로 끌어 들이는 결과를 낳았다. 미국은 9월15일 인천에 상륙해 전쟁을 악화시켰다. 이 시기 신중국은 이미 대만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만일 조선문제에서도 다시금 약한 모습을 보이면 미국의 욕심은 한도 없이 커질 것임이 분명했다. 중국은 외부 환경은 악화와 국내 반동기운 역시 고조되는 것에 당면해서 마오쩌둥은 웅대한 패기를 발휘에 당중앙에서 참전을 결정했다. 위기를 반전시켜 최후에 당시 상황 아래에서 신중국에 가장 유리한 결과를 얻도록 한 것이다.
두번째 문제. 중국이 참전한 원인이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참전 이익은 매우 컸고, 참전하지 않은 손해 역시 매우 컸다. 과거 중국의 항미원조 전쟁 결정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왕왕 조선의 정세만을 이야기하고 다른 문제, 즉 대만문제는 회피하거나 무시했다. 실제로 마오쩌둥이 조선에 출병하게 한 중요한 원인은 바로 대만문제였다. 당시 전쟁을 조선반도만 가지고 해석하면 안된다. 당시 대만과 조선반도는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조선 내전이 폭발할 당시 대만은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미국은 조선에 출병하는 날 대만에도 출병을 단행했다. 이는 당시 세계 전략 구조와 미국의 중국 침략 야심이 만든 것이다. 신중국 성립 이전에 미국은 장제스를 버렸다. 단 비밀리에 대만 독립 세력을 비밀리에 지지했다. 미국의 수뇌부는 1949년 이미 어떻게 대만에 출병할 것인지 계획을 수립해놓았다. 1950년2월 ‘중소우호동맹조약’ 서명 이후 미국은 대만에 간여하기로 결정했다. 만일 ‘조선내전’의 발발이 없었다면 그들은 다른 구실을 찾아냈을 것이다. 중국인민해방군이 대만을 해방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6월25일 ‘조선내전’이 발발하자 미국의 반응음 의외로 빨랐다. 이틀 후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조선에 파병함과 동시에 대만에 제7함대를 파병했다. 동시에 월남의 프랑스 군대에 고문단을 보내 베트남에서의 프랑스군에 전면적인 군사 원조를 제공했다. 이처럼 조선, 대만, 월남 세 개 전략 방향에서 중국에 대해 위협을 가했다. 게다가 가장 무리한 것은 미국이 ‘조선내전’을 이유로 중국의 대만에 파병, 통제한 것은 완전히 국제법 준칙상의 침략행위에 해당했다. 당시 미국은 조선내전발발을 구실로 중국의 영토인 대만에 파병한 근거는 황당무계한 침략행위에 불과하다. 그 해 11월28일 중화인민공화국대표 우슈취안(伍修權)은 유엔안보리에서 미국의 대만 침략행위를 규탄했다. “각국 대표단 여러분 스페인 내전을 이유로 이탈리아가 프랑스의 코르시카 섬을 점령할 권리를 가질 수 있습니까? 멕시코 내전을 이유로 영국이 미국의 플로리다를 점령할 권리를 가질 수 있습니까? 이는 전혀 근거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미군의 대만 침입과 중국의 대만 통제로 중국의 통일대업은 방애받았다. 어떤 중국인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반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조선, 대만, 월남 세 방향에서의 위협에 중국공산당 중앙은 마오쩌둥이 외친 ‘너는 네 것을 치고, 나는 내 것을 친다’는 원칙아래 합당한 반격을 선택했다. 가장 적절한 선택 방향은 대만이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이 사용할 수 있는 해군과 공군은 전무했다. 대만해협에서 미국과 작전을 펼칠 방법이 없었다.
최근 중국내에 역사 정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다. 항미원조전쟁은 1950년10월25일 발발했다. 미국은 이보다 4개월 전에 이미 대만을 통제했다. 미국 군대가 대만을 통제한 이후 그들은 강대한 해군과 공군을 해협 중간에 배치했다. 당시 지척인 금문도도 건너지 못한 해방군이 어떻게 바다를 건너 대만을 공격할 수 있었겠는가. 대만은 공격할 수 없었다. 단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조선전쟁’이었다. 중국의 우세한 육군을 이용해 미국의 침략에 반격한 것이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이후 지원군 간부 대회에서 이렇게 결론내렸다. “우리와 미제국주의의 대결은 피할 수 없다. 문제는 어떤 지점을 선택하느냐다. 이는 당연히 제국주의가 결정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도 결정한다. 현재 우리는 세개의 전장을 생각하고 있다. 모두들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알 것이다. 월남작전은 연해 도서에서 작전을 펼치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곤란하다.” 당시의 결론은 조선에 파병해 미국의 침략에 반격하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에는 세 가지 유리한 점이 있었다. 가장 유리한 것은 육군의 우세, 후방 병참 공급의 유리, 소련의 지원에서의 유리였다. 과연 이후 ‘조선전쟁’에서 신중국 군대는 충분히 자기의 육상 작전에서의 우세를 발휘했다.
전쟁을 평가하는 주요 요인은 기존의 목표를 달성했느냐의 여부다. 중국이 2년9개월동안 진행한 항미원조전쟁은 압록강변에서 시작해 최후에 세계 최대 강국을 500㎞ 후퇴시켰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는 수 백㎞의 안전 완충지대를 만든 것이다. 중국의 국가 위세와 군대 위세를 내걸고 수십년동안의 평화 국면을 만들어 낸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항미원조전쟁을 회고하면서 마오쩌둥의 정확한 판단에 감사해야 한다.
이상 중국이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속내를 정리하면 1. 한국전쟁과 항미원조전쟁은 다르다. 2. 중국의 참전은 자위적인 조치였다는 것이다. 또한 남침은 인정할 수 없다는 점도 명확히 했다. ‘내전’에서 누가 먼저 개전했냐는 중요치 않다는 논리다.
‘일사양용론(一史兩用論)’이 있다. 고구려의 역사가 한국의 역사임과 동시에 중국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중국측의 ‘괘변’이다. 중국은 한국전쟁 역시 자신의 국익에 입각해 ‘멋대로’ 해석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내전은 주권의 영역이다. 간여할 수 없다. 미국이 참전했으므로 중국도 참전했다. 미국이 대만에 파병해서 중국은 조선에 파병했다. 대만이 문제라면 유능한 육군 군인들을 뗏목에 태워서라도 대만에 출병을 해야지 왜 한반도에 파병을 했을까? 논리적으로 궁색하기 그지없는 논리다. 변화가 있다면 ‘북한을 돕기 위해’라는 부분이 거의 없어졌다는 점이다. 이제 철저히 중국의 국익만을 위해 나아가겠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한반도에서의 문제를 한반도의 문제만으로 보지 않고 배후 세력과 중국 자신의 문제로 바라본다는 것도 노출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 전략적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중국은 한국과 안보상 공통분모를 찾기 어렵다는 사실을 번번히 확인하고 있다. 전국시대 진나라의 발흥에 대하는 방법은 합종책(合縱策)과 연형술(連衡術)이 있었다. 굴기하는 중국을 대하는 한국으로서는 외교적 상상력이 더욱 더 요구되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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