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고 착한 영국신사를 연상하게 하는 E. 엘가(1857~1934)는 이‘위풍당당행진곡’으로 영국민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이 곡은 에드워드 엘가가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을 위해 작곡한 것이다. 이 곡이 발표되었을 때 국왕 에드워드 7세가 중간부분에 감격, 가사를 붙이게 해 ‘희망과 영광의 나라’를 만들었는데 이 곡이 바로 영국인의 국민가로 애창되고 있다. 이‘위풍당당행진곡’은 모두 다섯 곡으로 되어 있으며 유럽에서도 콧대가 높기로 소문난 영국인들에게 이 곡은 바로 그 콧대를 위풍당당하게 치켜세우는 역할까지 하고 있어 더더욱 사랑받는다.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Pomp and Circumstance Marches)은 5곡으로 구성되는 행진곡집인데 제1번 곡이 가장 유명합니다. 후에 가사가 붙어서 따로 <희망과 영광의 나라>라는 제목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엘가는 이 <위풍당당 행진곡>을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 행진곡으로 사용하려 했으나 그 목적은 이뤄지지 않았고 대신 대중적인 행진곡으로 널리 알려져 요즘에는 스포츠 경기 결승전 같은 데도 쓰이더군요. <위풍당당 행진곡>이라는 타이틀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델로>에서 인용되었다고 합니다. 곡의 힘찬 분위기라든가, <위풍당당>이니 <희망과 영광의 나라>니 하는 제목 때문에, 그리고 원래 대관식용으로 작곡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대통령 취임식 같은 의식에도 사용되는 것입니다.
위풍당당 행진곡
No.1 in D major
중간부의 유명한 선율로 가장 인기가 높은 D장조 제1곡은 당시 국왕 에드워드 7세가 이 선율에 감탄하여 가사를 붙이라는 권유에 따라 벤슨의 시 <희망과 영광의 나라(Land of hope and glory)>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그 후 이 곡은 독립된 성악곡이 되어 제2의 영국 국가처럼 애창되고 있다. 짧은 당당한 서주부의 뒤를 이어 선정적인 주제가 현으로 나오고 이어 베이스가 이어 받는다. 그리고 반복, 다음은 처음의 서주부가 다시 나오고 트리오로 들어간다. 다시 제 1부의 반복, 그리고 제1테마의 암시로서 곡이 끝난다.
No. 2 in A minor
위풍당당 행진곡 2번은 1900년 1번과 함께 작곡되어 1901년 10월에 Henry Wood's Queen's Hall 에서 초연되어 관객으로부터 많은 환호를 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을 쓴 이유에 대하여 엘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에 남겼다. "행진곡이 보다 큰 스케일의 음악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없다, 월츠도 일종의 고풍 타입의 느린 행진곡인데...폴카를 다룬 위대한 음악가 들도 있지 않는가? 나에겐 군인적 기질이 있는지 2 개의 행진곡을 작곡하게 되었다.부끄럽기보다는 자랑스럽다." 1번에 비하여 이곡은 행진곡보다는 보다 교향곡적인 내용으로 전개된다.
No.3 in C minor
C단조의 제3곡은 1904년 작곡되어 1905년 3월 8일 런던 퀸스홀(Queen's Hall)에서 엘가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No.4 in G major
작가 A.P. 허버트(A.P. Herbert)가 트리오 부분에 "모든 사람은 자유로워야 하며……"로 시작하는시를 붙인 G장조 제4곡은 1907년 작곡되어 1907년 8월 24일 역시 엘가의 지휘로 퀸스홀에서 초연되었다.
No.5 in C minor
제5곡 C장조는 1930년 작곡되었고, 1930년 9월 18일 런던 킹스웨이홀(Kingsway Hall)에서 엘가의지휘로 런던교향악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엘가: [Elgar, Edward, 1857.6.2~1934.2.23]
잉글랜드 우스터 출생. 가톨릭교회 오르간 연주자의 아들로 태어나 한때 아버지의 권유로 변호사 사무실에 근무하였으나, 음악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못하고 독학으로 각종 악기의 연주법과 작곡법을 습득하였다. 1880년경부터 직업음악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1900년 오라토리오 《제론티어스의 꿈》으로 파셀 이후 국제적인 명성을 떨치고, 31년 준 남작(男爵)의 작위를 받았다. 작풍은 후기낭만파에 가까우며 대표작에 전기 오라토리오 외에 관현악변주곡 《수수께끼》(1898), 교향시 《팔스타프》(1913) 등이 있다.
에드워드 7세 [Edward VII, 1841.11.9~1910.5.6]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이다. 청년시절부터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를 여행하여 견문을 넓혔으며, 스포츠 ·문화 ·사회문제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60세에 즉위하였는데, 당시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을 앞두고 긴장사태가 고조되어가고 있었다. 영국 헌법상 국왕은 국정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며 그도 그 관례에 따랐으나, 외교면에서는 여러 나라 제왕들과 인척관계에 있었고, 황태자 시절부터 어머니인 여왕을 대신하여 여러 차례 공식 석상에 나간 적이 있었기 때문에 국제 외교계에도 능통하여, 그는 각국을 순방하면서 영국의 입장을 유리하게 만들었다. 특히, 영국-프랑스 협상(1904), 영국-러시아 협상(1907)의 체결로 말미암은 3국협상의 성립에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